지난 게시판/서민(단국대 의대교수)이야기

정권 교체가 바꿔놓은 세상

튼씩이 2017. 6. 26. 21:58

야구와 기생충 이외의 것들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강준만 교수가 쓴 ‘인물과 사상’이란 계간지를 읽고 난 뒤부터였다. 훗날 수많은 ‘강준만 키드’를 양산해 낸 그 시리즈의 창간호는 대선이 있던 1997년 1월 출간됐는데, 부제가 ‘정권교체가 세상을 바꾼다’였다. 저자는 그 책에서 김대중(DJ)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일들이 많을 것이라면서 DJ에 대한 지지를 촉구했다. 그때만 해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과 그 후손들이 36년간 장기집권을 해왔기에, 그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의 바람대로 그해 말 치러진 대선에서 DJ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충격적인 일들이 몇 있었지만, 세상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새 대통령이 대선 직전 일어난 외환위기를 수습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정권교체를 위해 할 수 없이 김종필(JP)씨와 손을 잡은, 소위 ‘DJP 연합’이 개혁의 발목을 잡아서였다. 뒤를 이은 노무현 대통령이라도 세상을 바꿔줬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집권 초기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하는 등 야당과의 협치에 지나치게 매달리느라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 정권교체의 충격은 오히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때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가까워진 듯했던 남북관계가 원래대로 돌아갔고, 대통령은 국민의 뜻과 반대되는 일만 골라서 해댔으니까 말이다. 애써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 정부로 가는 데 있어서 완충역할을 해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 생각해 보라. 노무현 정부에서 바로 박근혜 정부로 갔다면, 국민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대선을 6개월 앞둔 여론조사에서 홍준표 후보가 48.5%의 지지를 얻어 24.5%에 그친 문재인 후보에게 크게 앞섰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18.3%로 3위입니다.”

 

지금이 2017년 6월 말이니 원래대로라면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지 위와 같은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대로 선거가 치러졌다면 어땠을까. 각종 재·보선에서 전패하는 등 지리멸렬이 삶의 철학이 됐던 야당이 1000만명 넘는 노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여당 후보를 이기긴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신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에 박근혜에게 최순실을 보내줬고,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이 정권교체는 이전의 그것과는 달리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박근혜·최순실 비리의 철저한 규명과 처벌, 세월호 사건의 재조사, 검찰개혁,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만들기, 이 정도가 집권 초기 문재인 정부가 해줬으면 하는 버킷리스트였으리라. 그런데 대통령은 이런 일들은 당연히 할 것이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4대강 비리도 조사한단다. 게다가 외교부와 국토부에 여성을 장관으로 지명하는 등 성평등도 지향하고 있다. 대통령의 인기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이런 대통령에 감동해서였을까? 서울대병원은 고 백남기씨의 사인을 병사에서 외인사로 바꿨다. 물대포에 맞아 머리를 다친 게 사망원인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제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린 셈이다. 서울대병원 측은 “면밀한 내부 검토를 통해 신중하게 사망원인을 변경했”으며 “정치적 외압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백씨의 사망원인을 병사로 발표한 2016년 10월에도 “사망진단서 작성과 관련해 외압이 전혀 없었다”라고 했으니, 모두 자발적인 판단이 맞다. 같은 기관에서 같은 사람에 대해 사인을 달리 발표한 게 이해가 안 가겠지만, 그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박근혜 시절에는 의사들의 판단력이 마비됐었지만, 정권교체가 의사들의 판단력을 바로 세웠다고. 감동적인 장면은 또 있다. 백씨 사망 당시 경찰청장이던 이철성씨가 백씨와 그 유족에게 사과한 것이다. 기자간담회를 열어 “깊은 애도와 함께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한 것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유족을 직접 만나 재차 사과하겠단다. 이전 정권에서 이씨는 결코 이런 분이 아니었다. 사과할 의향이 없다고 거듭 밝혔고, 심지어 백씨가 사경을 헤맬 때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병문안을 가는 게 결과적으로 사과의 의미가 돼 가지 않는 게 맞다”고 한 적이 있으니, 최근 그가 보이는 모습은 도저히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일어난 기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바로 정권교체다. 정권교체가 박근혜 시절 깊은 잠에 빠진 이씨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다는 것.

 

자신이 잘하는 것도 모자라 주변인들까지 모조리 감화시키다니, 이번 정권교체는 정말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줄 것만 같다. 여기에 긍정적 요소가 하나 더 있다. 흠결이 있는 장관들을 임명했다는 이유로 자유한국당이 협치를 포기한 것이다. JP와 동거했던 DJ의 예에서 보듯,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꿈꿨던 노무현의 예에서 보듯, 보수세력의 비위를 맞추다간 되는 일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문 대통령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은, 그 자체로는 아쉬울 수 있지만, 세상을 정말로 바꾸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리라. 4년10개월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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