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서민(단국대 의대교수)이야기

판사님의 큰 그림

튼씩이 2017. 6. 9. 22:47

한 남성이 헤어지자는 동거녀의 말에 격분해 그녀를 패 죽였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엽기적인데, 그는 동생과 함께 인근 밭에 그녀를 묻고 시멘트를 섞어 암매장한다. 이 엽기적인 사건은 4년이 지난 2016년에야 진상이 밝혀졌고, 결국 남자는 구속된다. 이분은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을까. 20년 이상이라고 답할 분들이 많겠지만, 판사님은 달랑 징역 5년을 선고한다. 반면 자신의 딸을 성폭행했다는 상담교사를 살해한 뒤 자수한 어머니는 10년형을 받았기에, 판결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누리꾼들의 관심이 뜨겁다. 일부에선 “암매장보다 자수가 더 나쁘냐”며 의아해하지만, 그건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게 다 판사님이 그리는 큰 그림이니까.

 

사람들은 흔히 범죄 없는 세상을 원한다고 말한다. 실제 그런 세상이 오면 일반인들이야 좋을지 몰라도, 법조인들은 죽을 맛이다. 판사와 검사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니 좀 낫지만, 변호사는 밤에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판검사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무위도식한다고 눈치보는 것도 미안하고, 언제 잘려서 변호사 개업을 해야 할지 모른다. 법조3륜의 중심축인 판사들이 총대를 멘 건 그런 이유다. 이분들은 범죄가 생각보다 잘 일어나지 않는 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오랜 기간 감옥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이분들은 그런 불안감을 없애주는 방법을 연구했고, 다음과 같은 안전장치를 만든다. 우선 ‘심신미약’이란 조항을 금과옥조로 떠받들기 시작한다. 범행 당시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형을 사정없이 깎아줬다. 한 여자아이의 인생을 짓밟은 조두순이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우겨 겨우 12년형을 받은 사건이 대표적이지만, 조씨 말고도 많은 이들이 비슷한 이유로 감형을 받고 있다. 이 조항의 효과는 첫째, 술을 마시면 대담해지니 범행을 저지르기 쉬워지고, 둘째, 혹시 붙잡힌다 해도 적은 형량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러다보니 범죄자들 사이에선 ‘범행 전 한잔 어때요?’란 덕담이 유행할 지경이란다. 심신미약은 알코올뿐 아니라 정신질환을 앓은 이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정신병이 불치병은 아니건만, 과거에 우울증이나 조현병 등의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면 무조건 감형사유가 된다. 그러니 범행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의사에게 찾아가 우울한 표정을 짓거나, 환청이 들린다고 떼를 써보시라. 운이 좋다면 바로 풀려날 수도 있다.

 

다음으로 판사들은 항소를 하면 형량을 낮게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범행 당시 상황이 변한 게 없다면 1심과 2심의 형량이 같아야 하고, 항소 자체가 판결에 대한 불복을 의미하니 괘씸죄가 추가되는 게 맞을 것 같지만, 판사들은 거의 대부분 형을 깎아준다. 왜? 항소를 자꾸 해야 자신들의 일이 많아지고, 변호사도 수임료를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범죄자들에게 충분히 유리한데, 판사님들은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과 합의하면 형량을 대폭 줄여주는 서비스도 시행하고 있다. 그 바람에 피해자 측은 가해자로부터 합의를 해달라는 협박에 시달려야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서가 아니라 더럽고 무서워서 합의를 해주게 된다. 그야말로 감형3종 세트로, 이는 범죄 많은 사회가 오길 바라는 판사들의 큰 그림이다. 위에서 예로 든 암매장 남성을 보자. 보통 사람 같으면 5년형도 감사히 받을 텐데, 그는 형이 너무 길다며 항소를 한다. ‘항소 할인 서비스’가 있는데 이 권리를 묵혀두는 건 바보짓일 테니, 그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다. 과연 항소를 맡은 판사님은 5년에서 무려 2년을 깎아주신다. 징역 3년, 근거가 뭘까. 첫째, 피고인이 반성하고, 둘째, 우발적 범행인 데다, 셋째, 피해자의 유족이 처벌을 원치 않기 때문이란다. 반성하는 사람이 자수하는 대신 시체를 암매장했을까 싶고, 사건의 우발성은 1심에서도 고려됐을 텐데 2심에서 또다시 적용되는 게 경이롭다. 유족이 합의한 것도 범인이 얼마 안돼 출소하는 게 두려워서일 텐데, 이게 형을 깎아줄 이유가 돼야 할까? 범인들이 하루빨리 사회로 나와 재범을 저지르라는 판사의 독려라는 가설을 제외한다면, 이 판결을 이해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미야베 미유키가 쓴 <스나크 사냥>에서 인간 말종인 남녀는 단순히 자동차를 빼앗기 위해 마침 그곳을 지나던 어머니와 딸을 죽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너를 마셨다는 이유로 심신미약 포인트를 획득하고, 제정신이 아니란 이유로 구치소 대신 병원에서 편하게 수감생활을 한다. 재판할 때 반성하는 척까지 하는 등 적은 형량이 나올 게 거의 확실해 보이자 피해자의 아버지는 결국 총을 구해 범인들을 죽이러 간다. “앞으로 오년 뒤, 십년 뒤에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살해당한 내 아내와 딸의 이름 뒤에 앞으로 그런 인간들에게 걸려들어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기다란 명단이 생길 테니까.”(326쪽)

 

동거녀를 죽이고 암매장한 남성은 2019년, 조두순은 2020년 사회로 복귀한다. 이들에게 피해를 볼 여성들의 기다란 명단이 생길 것 같지만, 판사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법률수요 증대라는 큰 그림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