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책을 읽자

앵무새 죽이기 - 하퍼 리

튼씩이 2019. 1. 13. 10:38




작품 해설 [ 타자(他者)의 자리에서 돌아보기 ]   김욱동


미시시피 주나 루이지애나 주와 함께 미국 남부 가운데에서도 남부라고 할 앨라배마 주는 흑인 민권 운동의 온상과 같은 곳이다. 미국의 성자로 흔히 일컫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의 양심으로 처음 그 이름을 떨친 곳도 이곳이요. 일련의 사건으로 1960년대의 흑인 민권 운동에 처음 불을 지핀 곳도 이곳이다. 1890년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이른바 '짐 크로우 법'은 온갖 방법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제한했다.


예를 들어 흑인들은 공공건물에 들어갈 때 백인이 사용하는 문이 아닌 다른 문을 사용해야 했다. 식당에서도 흑인과 백인은 같은 방에서는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물론 화장시이나 물을 마시는 음료대도 백인용과 흑인용으로 엄격히 구별되어 있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도 서로 달랐고 감옥도 달랐으며, 심지어는 죽어서 묻히는 묘지까지도 서로 달랐다. 버스나 기차를 타도 흑인은 맨 뒷자리에 앉아야 했고, 그 뒷자리마저도 백인이 버스에 올라타면 양보해야 했다.


1955년 12월 앨라배마 주 먼트가머리에서는 놀라운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하루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올라 뒷자리에 앉았다. 바로 그때 백인 한 사람이 버스에 올라탔고, 운전 기사가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는데도 로자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결국 로자는 법을 어겼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먼트가머리에서는 1년에 걸쳐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고, 마침내 공중 교통에서 인종 차별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해 오서린 루시라는 여성이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터스컬루사 소재 앨라배마대학에 등록하려고 했다가 백인의 소동으로 입학을 포기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두 사건보다 앞서 1931년에는 역시 스코츠보로 재판사건으로 앨라배마 주가 미국 전역에 걸쳐 큰 관심을 끌었다. 흑인 청년 아홉 명과 백인 청년 두 명 그리고 백인 여성 두 명이 테네시 주에서 화물차를 얻어 타고 앨라배마 주로 가고 있었다. 화물차 안에서 흑인 청년과 백인 청년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백인 청년들은 강제로 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앨라배마에 도착하자마자 흑인 청년들은 체포되고, 백인 여성은 거짓으로 흑인 청년들이 자신들을 강간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무려 20년을 끈 재판에서 흑인 청년 여덟 명은 직접,간접으로 크나큰 고통을 받았다. <앵무새 죽이기>를 쓰면서 하퍼 리는 이 사건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영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메이옐라 이웰과 톰 로빈슨을 둘러싼 사건은 스코츠보로 사건과 아주 비슷하다.


다른 작품도 매한가지지만 이 작품에서 지리적 배경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대적 배경이다. 이 소설은 비록 1960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뉴욕 증시의 몰락으로 시작한 경제 대공황은 미국 국민들에게 크나큰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작가가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듯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두려움 그 자체 말고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대공황의 여파는 여간 심각하지 않았다. 같은 일자리를 두고 백인과 흑인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종 차별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바로 이러한 공간적, 시간적 배경에서 나온 작품이다. 존 스타인백의 작품을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을 떠나 제대로 생각할 수 없고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미시시피 주를 떠나 제대로 생각할 수 없듯이, 하퍼 리의 작품도 1930년대와 앨라배마 주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작품의 배경인 메이콤은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축소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앵무새 죽이기>는 하퍼 리의 유일한 작품이다. 대학에 다닐 때 학생들이 발행하던 잡지에 글을 쓰고 이 소설을 출간한 뒤에 대중 잡지에 세 편의 에세이를 발표한 것을 빼놓고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하퍼 리의 친척인 리처드 윌리엄스가 그녀에게 왜 두 번째 작품을 쓰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저자는 "그렇게 히트를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실제로 작가는 1961년, 그러니까 <앵무새 죽이기>를 출간한 그 이듬해에 두 번째 작품을 쓰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출간하지 않고 있다. <폭풍의 언덕>을 비롯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이 작품도 작가의 처녀 작품이자 맨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작품 창작과 관련하여 하퍼 리는 언젠가 "글을 쓴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만이 나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 문학 작품 가운데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이 출판되자마자 100주에 걸쳐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출간된 지 2년 만에 무려 5백만 권 이상이나 팔렸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어떠한지를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리터러리 길드, 북어브더먼스 클럽,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이 앞을 다투어 이 책을 우수도서로 선정했다. 1961년도 소설 부분 퓰리처 상을 비롯하여 여러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로 만들어지고 연극으로 각색되어 무대에 오르면서 이 작품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더구나 이 작품은 단순히 흥미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왔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 고문이었던 제임스 카빌은 이 소설을 두고 "이 작품을 읽는 순간 나는 그녀(작가)가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남부에서 태어나 자라온 카빌은 거의 평생 동안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작품을 읽는 순간 그러한 믿음을 떨쳐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인생관을 바꾼 사람은 비단 카빌 한 사람뿐이 아니다. 1991년에 북어브더먼스 클럽과 미국 국회도서관이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책은 놀랍게도 성경 다음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바꿔놓는 데 이바지한 책으로 꼽혔다. 그러니까 종교의 경전이 아닌 세속적인 책으로는 이 소설이 단연 뭇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이 소설이 미국 고등학교 독서 목록에 늘 약방의 감초처럼 올라와 있고, 지금까지 4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단순히 미국의 국한된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는 것은 좁은 소견이다. 물론 구체적인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삶의 문제다. 어떤 의미에서 흑백 갈등을 둘러싼 인종 문제는 좀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뛰어난 문학 작품이 으레 그러하듯이 이 작품도 구체성과 보편성, 특수성과 일반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앵무새 죽이기>는 소설 전통에서 보면 성장 소설(빌둥스로만)에 속한다. 성장 소설이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을 비롯하여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나이 어린 주인공이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같은 성장 소설 전통에 속하면서도 <앵무새 죽이기>가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나이 어린 소년이 아니라 소녀를 화자이며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문학사에 우뚝 서 있는 성장 소설은 거의 하나같이 소년을 중심 인물로 다루어 왔다. 이 작품은 나이 어린 여성을 화자와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는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성장 소설은 하나같이 인식론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경험을 통하여 주인공은 아주 값진 삶의 교훈을 배우기 때문이다. 성장 소설에서 '배우다'니 '깨닫다'니 하는 낱말이 민요 가락의 후렴처럼 자주 쓰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앵무새 죽이기>의 화자이자 주인공 스카웃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진 루이즈 핀치다. 작가는 스카웃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그러니까 줄잡아 3년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어른이 된 진 루이즈 핀치가 여섯 살에서 아홉 살이 되던 때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는 수법을 구사한다. 때로는 스카웃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이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녀의 그것이라고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작품이 처음 시작될 때의 스카웃과 작품이 끝나는 장면에서 독자가 만나는 스카웃 사이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물론 나이를 세 살 더 먹었다고는 하지만 생리적 성장이나 육체적 발육을 훨씬 뛰어넘는 정신적 성장과 영혼의 개안을 느낄 수 있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지금껏 그렇게도 만나보고 싶어하던 부 래들리를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다. 부축하다시피 하여 그를 집에까지 데려다준 뒤 스카웃은 가랑비를 맞으며 집을 향하여 걸어가는 동안 "나는 나이가 부쩍 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밝힌다. 여기에서 스카웃이 말하는 나이란 다름 아닌 정신적 연령을 가리킨다. 3년이 아니라 아마 그 이상 몇십 년이 지나야만 비로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삶의 교훈을 배운 것이다.

 

또한 스카웃은 "집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나는 오빠랑 내가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대수를 빼놓고는 이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별로 많은 것 같지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도 '컷다'는 말은  두말할 나위가 없이 신체적 성장이 아니라 정신적 성장을 뜻한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가르치는 대수를 제외하고 나면 이제 삶에서 더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스카웃이 왜 그렇게 제도 교육을 싫어하는지도 알 만하다. 그녀는 학교 교실보다는 오히려 삶의 현장에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터득한다. 스카웃이 이렇게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하는 데에는 변호사인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의 역할이 무척 크다. 이 밖에도 오빠 젬과 미시시피에서 온 친구 딜을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헨리 라파예트 듀보스 할머니와 모디 앳킨스 아줌마, 고모 알렉산드라,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 등도 스카웃의 정신적으로 상장하는 데 안내자 역할을 맡는다.

 

그렇다면 스카웃이 고통과 좌절을 겪으며 얻는 삶의 교훈이란 과연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와 관용 그리고 사랑이다. 스카웃은 요즈음 지식인 사회에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타자(他者)'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자신의 입장에서 남을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이와는 반대로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카웃은 그토록 무서워하던 래들리 집 현관에서 버티고 서서 자신의 집과 이웃을 바라본다. 스카웃은 "아빠가 정말 옳았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한다. 늘 자신의 집 현관에서 래들리 집을 바라보던 태도에서 이제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래들리 집 현관에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입장에서 스카웃은 비로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참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는다.

 

스카웃은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카웃의 이웃집에 살고 있는 부 래들리는 바로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사춘기 때 친구를 잘못 사귄 탓에 잠시 물의를 일으킨 사건 때문에 그는 평생 동안 집 안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따돌림을 받고, 스카웃과 젬 그리고 딜 같은 아이들에게 놀이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몇 십년 동안 창가에서 젬과 스카웃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그는 그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와준다. 속이 빈 나무 속에 온갖 선물을 갖다놓은 것도 그였고, 마지막 장면에서 밥 이웰로부터 그들을 구출해준 것도 바로 그였다.

 

스카웃은 자신의 집 안에서는 부 래들리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상하게 돌봐주지만, 막상 집 밖으로 나와서는 부 래들리로 하여금 신사처럼 자신을 인도하도록 한다. 행여 부 래들리가 이웃 사람들에게 약한 존재로 인식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부 래들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스카웃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부 래들리가 유령이나 흡혈귀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어린이를 돌보아주는 다정다감한 인간임을 새삼 깨닫는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부 래들리보다도 훨씬 더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다. 앞에서 말한 스코츠보로 사건이나 로자 팍스 또는 오서린 루시 사건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늘 서자 취급을 받아왔다. 톰 로빈슨의 사건을 통하여 스카웃은 인간이란 피부 색깔만이 아니라, 짐의 지적대로 몸 속에 흑인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취급하는 것이 이 무렵 남부 사회의 현실이었다. 이웰 집안 사람들처럼  내세울 것이라고는 오직 흰 피부밖에 없는 백인들에게 흑인은 자신들의울분과 분노를  터뜨리는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다.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를 비롯하여 존 테일러 판사와 메이콤 군의 보안관 헥 테이트 그리고 모디 앳킨스 같은 몇몇 백인을 빼놓고서는 남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종 차별주의자들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자못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애티커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엽총을 사주면서 어치새 같은 다른 새를 죽이는 것은 몰라도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고 말한다. 다른 새들과 달리 앵무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먹거나 창고에 둥지를 트는 등 해를 찌치지 않는다.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새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부 래들리, 톰 로빈슨은 바로 앵무새와 같은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나 아집 때문에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스카웃은 동료 인간에 대한 관심을 점차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로 넓혀 나간다. 아버지 애티커스는 젊었을 때 '명사수'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총을 잘 쏘면서도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 미친 개를 총으로 쏠 떄에도 마지못해 그렇게 한다. 밥 이웰의 협박을 받은 뒤 아이들이 총을 가지고 다니라고 설득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렇게 애티커스가 총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타고난 사격술 때문에 자칫 다른 생명을 빼앗지나 않을 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모디 애킨스는 스카웃에게 "너희 아빠는 아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살아 있는 모든 생물에 대해 부당한 재능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총을 내려 놓으신 걸 거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총을 쏘지 않겠다고 결심하신 거야"라고 말한다. 모디 앳킨스도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척 남다르다. 스카웃은 앳킨스가 "하나님의 땅에서 자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심지어는 잡초까지도 사랑했다"고 밝힌다. 스카웃은 젬이 쥐며느리 같은 언뜻 하찮아 보이는 벌레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한다.

 

스카웃은 알렉산드라 고모로부터 숙녀가 되도록 강요받는다. 남부의 전통적인 여성상에 길들여진 알렉산드라는 스카웃을 '숙녀'로  만들려는 데 온갖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언제나 멜빵 바지를 입고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걸핏하면 친구들과 싸우는 스카웃에게 적잖이 실망을 느낀다.  '남부 여성'이라고 하여 남부 사회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북부 사회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알렉산드라가 그렇게 안달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심지어는 젬 마저도 때로는 스카웃이 '계집애'처럼 처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스카웃에게 숙녀가 된다는 것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남부 여성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숙녀'란 우아하게 드레스를 차려입고 바느질을 하거나 요리를 잘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스카웃에게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의 숙녀가 되는 일이다.  찰스 디킨스는 <위대한 유산>에서 나이 어린 주인공 핍을 통하여 '신사'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앵무새 죽이기>는 스카웃이 '숙녀'가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점에서 핍과 스카웃은 허구적 남매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이 작품의 주제를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절의 변화를 찬찬히 눈여겨보아야 한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여름이 중요한 시간적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후반부에 와서는 가을이 중심적인 시간 배경이 된다. 가을은 조락과 소멸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성숙과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과 더불어 스카웃은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는데, 다른 책을 읽던 도중 주인공이 이 책을 언급한 대목을 읽으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는데, 1년 만의 회사 복귀, 그것도 객지에서 시작하는 생활이라 회사적응에 힘들어 책 읽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틈을 내어 속도를 낸 결과 2주 만에 완독에 성공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많아 내용연결에 어려움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책 속으로 온전히 빠져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