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서민(단국대 의대교수)이야기

대통령의 침묵

튼씩이 2016. 4. 19. 21:40

난 말주변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래서 아주 절박할 때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게 됐다. 학교에서 하는 회의 때 자발적으로 말을 한 적은 거의 없고 혹시 누가 내 의견을 물을까봐 전전긍긍하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말 잘하는 것에 대한 욕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잘생긴 사람보다 말 잘하는 사람이 훨씬 더 부러웠고, 특히 1~2분이면 충분한 얘기를 10분씩 하는 분들을 보면 아예 넋을 잃었다. 달변가의 꿈을 품고 혼자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말주변은 잘 늘지 않았다. 이 말재주로 방송에 나갔을 때 남들은 이렇게 날 격려했다. “너에겐 어눌한 데서 오는 매력이 있어.”

 

처음 박근혜 대통령을 봤을 때 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더구나 대통령은 정치인이었으니, 말을 못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눌변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다들 알다시피 대통령은 터놓고 대화할 사람이 거의 없는 청와대에서 10대와 20대를 보냈고, 유신이 몰락한 이후에는 20년 가까이 칩거를 했다. 그 기간 중 책이라도 열심히 읽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잘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정치판 입문의 기회로 삼았던 1998년 대구 보궐선거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가 했던 연설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가… 아버지는… 아버지를… 아버지!” 여기서 떨어졌다면 스피치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화술을 키웠을 텐데, 박 후보는 경쟁자로 나왔던 엄삼탁 후보를 엄청난 표차로 이기면서 국회의원이 됐다. 그 후에도 대통령은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세 도중 아버지를 몇 번만 부르면 표가 쏟아졌으니까. 설마 이러다 대통령까지 될까 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다!

 

대통령은 일반 정치인과 달랐다. 대선후보 시절 TV 토론회도 이리저리 피해 다닌 대통령이었지만, 대통령이란 자리가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해야 하는 만큼 마이크 앞에 설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다음 두 가지 전략을 취했다. 첫째, 가급적이면 말을 하지 않기. 다들 대통령의 입만 쳐다볼 때조차 말하기를 회피했고, 아랫사람을 시켰으니까. 메르스 파동때 황교안 총리가 대국민사과를 하게 만든 게 대표적인 예다.

 

둘째, 돌발 상황 피하기. 어쩌다 말을 해야 할 때는 미리 원고를 준비해 프롬프터에 띄운 뒤 그냥 읽었고, 신년 기자회견처럼 피할 수 없는 행사에선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를 사전에 받음으로써 말주변이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할 말만 하고 질문은 받지 않는 황당한 회견도 있었으니, 대통령이 얼마나 말하기에 공포감을 갖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이러면서도 대통령은 자신이 눌변가라는 세간의 인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무회의 때처럼 자신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은 말을 길게 늘여 함으로써 달변가의 이미지를 심으려 했다. ‘밥을 먹었다’는 것보단 ‘입을 통해 밥을 몸 안에 집어넣었다’가 훨씬 더 지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게 무슨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그런 가운데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된다.” 박근혜 어록으로 남은 이 말은 달변가에 대한 대통령의 욕망을 너무도 잘 드러냈지만, 너무 말을 길게 하려다보니 주어가 뭔지 스스로 헷갈렸고, 그 결과 정체불명의 문장이 탄생해 버렸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온 뒤 국무위원 중 “그게 무슨 뜻이죠?”라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걸 보면 그들도 대통령으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듣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 밖에도 대통령은 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이 문장을 길게 늘이다 발생한 참사였다.

 

총선이 새누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선거 참패의 원인이 유승민 등 소위 배신자를 쫓아낸 뒤 자신과 친한 인사들을 국회에 보내려고 무리수를 둔 대통령에게 있건만, 대통령의 반응은 좀 어이없었다.

선거 다음날 청와대 대변인의 말이다.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리할 때 침묵하고, 정 말해야 할 때는 아랫사람을 시킨다는 첫 번째 원칙이 잘 구현되긴 했지만, 너무한 것 아닌가?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는지 며칠 뒤 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은 총선에 대해 추가로 언급한다. “앞으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겠다.” 문장을 억지로 늘이지 않고 짧게 말한 건 잘했다고 칭찬할 만하지만, 그토록 열을 올리신 이벤트의 결과에 대한 반응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대통령이 말을 잘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달변인 사람만이 대통령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어눌해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해주는 대통령이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니, 그가 해야 할 말을 역시 눌변가인 내가 대신 해준다. “제가 국민을 우습게 보고… 어 그러니까… 너무 오만하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겸허한 정치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