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내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부터 조금씩 올라오던 감정은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고, 책을 다 읽은 지금에는 참담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지천에 널려 있는 풀, 꽃, 나무 이름까지 빼앗긴 채 지금도 우리의 이름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움을 넘어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나아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노력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한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나고, 일제강점기 하에서 배워온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역사학자와 겹쳐지면서 언제쯤 우리는 제대로 된 우리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든다.
그러는 동안 큰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과정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개수염, 개쓴풀, 개쇠뜨기 같은 ‘개’가 붙은 이름은 일본 말 이누(개)에서 유래한 것이며 섬거북꼬리는 제주도산이고, 섬초롱꽃은 울릉도산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 침략은 단순한 영토 침략을 넘어 이 땅에 사는 수 많은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우리 고유의 이름마저도 창씨개명으로 없애버렸다. 그런 와중에 우리 땅에 나고 자라던 수많은 풀·꽃·나무도 제 이름을 잃고 일본 이름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 6~7쪽 -
책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질문을 숱하게 던졌다. 이제 와서 일본 말에서 유래한 식물 이름을 찾아낸다 한들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낸 것은 우리 풀꽃 이름의 유래가 정리되지 못한 채 화려한 사진만 내세운 도감이 넘쳐나는 데 불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 8쪽 -
사족 같지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우리말 ‘느릅’이 일본말로 ‘니레’이고, ‘철쭉’은 ‘쓰쓰지’인 것은 고대 한국어의 영향이다. 다음에 내는 책은 고대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식물 이름을 소개하고 싶다. - 9쪽 -
참고로 일본에서는 식물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고 가타카나로만 표기하고 있다. 이는 일본 식물학의 아버지 마키노 도미타로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마키노는 식물 이름을 중국 문자인 한자로 표기하는 것에 대해 민족적 자존심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민족적 자존심도 없이 한자는 물론이고 일본 말로 된 것을 겨우 번역하여 식물 이름을 지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 51쪽 -
아름다운 우리 풀꽃 이름에 붙은 일본 말 찌꺼기는 지금껏 대대적인 수술 한 번 없이 여기까지 왔다. 내로라하는 식물학자 가운데는 예전에 부르던 이름을 손톱만큼도 바꾸면 안 된다는 사람이 있으니 개탄스럽다. 표기만 해도 그렇다. 태백오랑캐꽃은 지금 태백제비꽃으로 부르지만 이런 것조차도 펄쩍 뛰는 사람이 많다. 식물 관련 용어는 아직도 일제강점기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라 씁쓸하다. - 64쪽 -
나카이는 도쿄제국대학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을 드나들며 조선 식물 연구라는 명목으로 방방곡곡의 식물을 조사하는데,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에 관한 연구가 모두 그러하듯 식민지 수탈을 위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 91쪽 -
조선물산공진회란 한마디로 박람회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의 대표 궁궐 경복궁을 박람회장으로 꾸미기 위해 파괴했다. 조선총독부는 예산이 확보되자 멋대로 전각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 등 궁궐 파괴에 착수했다.
500년 사직의 상징이던 궁궐은 원형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일제는 지금의 광화문 바로 안쪽에 분수대를 만들고 왼쪽에는 양어장을 만들었다. 그뿐만아니라 경복궁 안에 전시관, 미술관, 음악당, 철도국특설관, 동양척식특설관, 기계관 등을 빼곡하게 짓고 야외 전시장이라는 명목으로 지광국사현묘탑 등 전국 사찰에 있던 석탑, 석등, 석불, 석비를 무단으로 가져와 전시했다. - 156쪽 -
국권을 빼앗기고 자신이 살던 궁궐을 뜯어내어 박람회장으로 개조한 것만도 통탄할 일인데 이들에게 잘했노라고 상까지 주게 만든 것은 조선 능멸 최악의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이어 왕비도 나흘째 되는 날 가마를 타고 조선물산공진회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 157쪽 -
우리 겨레는 오래전부터 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이용해왔다. 당연히 오랫동안 불러온 우리 고유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일환으로 우리 산야의 식물들이 채집하고 이름 붙이면서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식물의 호적이라 할 수 있는 학명에는 일본 학자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큰개불알꽃, 며느리밑씻개, 도둑놈의갈고리, 좀개갓냉이 같은 저속한 이름은 일본 이름을 번역한 것이다. 심지어 번역조차 엉터리인 것이 많다. 광복 70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우리 풀꽃 이름은 아직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및 관련 기관은 이 문제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예전부터 써오던 이름은 바꾸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광복 100주년이 되어도 우리 풀꽃은 일본 말에 오염된 지저분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보고 우리의 풀꽃에 우리 이름을 붙여줘야 할 것이다. - yes24 책소개에서 -
저자 - 이윤옥
일본 속의 한국 문화를 찾아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면서 『신 일본 속의 한국문화답사기』,『일본 속의 고대 한국 출신 고승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우리말 속에 숨어 있는 일본말 찌꺼기를 다룬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 국어사전』을 펴냈다. 한편으로 『문학세계』시 부문으로 등단하여 친일 문학인의 풍자 시집 『사쿠라 불나방』,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다룬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전5권)를 펴냈고, 『서간도에 들꽃피다』는 영문판 『41 heroines, flowers of the morning calm』, 『FLOWERING LIBERATION-41 women devoted to Korean independence』로 번역 출간되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순화위원을 지냈으며 현재는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으로 한일 간 과거의 역사를 딛고 미래의 발전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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