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하여 일반인들도 감염병에 관한 관심이 대단히 높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엔(n)차감염’이라는 복합어가 있다. 엔차감염은 감염의 발생 단계를 설명하는 말의 하나이다. 즉 한 감염병이 특정 집단에서 어떤 사람에게 처음 발병했을 경우를 일차감염이라고 하고, 일차감염 환자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었을 경우를 이차감염이라고 하며, 삼차감염 이상의 발병 경로를 잘 모르는 후속 단계의 감염을 통틀어 엔차감염이라고 말한다. 수학이나 통계학에서 잘 모르는 수를 상징적으로 로마자 알파벳의 ‘n’을 사용하여 표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엔차감염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이 있고 그동안 민원이 많이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네이버 검색 결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엔차감염 대신에 ‘연속감염’ 또는 ‘연쇄감염’이란 말을 추천한다는 보도 자료를 내놓았다. 일리 있는 권장 용어라고 생각은 든다. 혹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우리말은 없는지? 새로운 말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생각해 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후속감염’이란 말도 가능하다고 2020년에 열린 의학한림원 용어 연구집회(워크샵)에서 별도로 제시한 바 있다. 위에 언급한 ‘연속감염’, ‘연쇄감염’, ‘후속감염’의 세 가지 용어는 모두 비슷하고 전체적인 의미 파악에도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고 보나, 어딘가 원래 용어인 ‘엔차감염’이 추구하는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 그림 1. 보건복지부에서 제작한 감염경로 사례 안내문
이 원고를 작성 중에 불현듯 우리말의 ‘몇’이 위에 언급한 ‘n’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우리말샘 사전에서 ‘몇’을 검색한 결과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 몇 「001」 「수사」 ((흔히 사람을 뜻하는 명사 뒤에 쓰여))그리 많지 않은 얼마만큼의 수를 막연하게 이르는 말.
★ 몇 「002」 「수사」 ((주로 의문문에 쓰여))잘 모르는 수를 물을 때 쓰는 말.
★ 몇 「003」 「관형사」 뒤에 오는 말과 관련된, 그리 많지 않은 얼마만큼의 수를 막연하게 이르는 말.
★ 몇 「004」 「관형사」 ((흔히 의문문에 쓰여))뒤에 오는 말과 관련된 수를 물을 때 쓰는 말
위의 정의에 의하면 ‘엔차감염’을 ‘몇차감염’으로 번역한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몇차감염은 위에 언급한 다른 용어들보다 직역에 더 가깝게 느껴지므로, 일반인들이 의역한 용어들을 더 편하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다. 전문용어 가운데에는 ‘erythropoietin’을 ‘에리스로포이에틴’으로 표기하듯이 외국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표기한 음차어가 많다. 이 경우 erythropoietin을 우리말로 ‘적혈구형성인자’라고 번역하여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난히 음차어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기에 공론화되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토의할 경우 이런 음차어 부류의 전문용어는 새로 제시되는 쉬운 우리말이 비교적 잘 정착되는 편이다. 따라서 엔차감염은 위에 제시된 우리말 중 어느 하나로 추후 정착될 가능성이 높다. 엔차감염이 우리말로 어떻게 정착되는가를 바라보는 것은 내게 다소 흥미거리가 아닐 수 없다.
▲ 그림 2.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를 표현한 그림
우리나라 전문용어는 과거에는 일본학자들이 주로 한자어를 사용하여 번역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일부 변형한 것을 대부분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의학계를 예로 들어 볼 때 일본은 요즈음 외국어를 우리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고 새로운 용어들을 적극적으로 번역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의 언어학계에서는 고유어를 활용하는 한국 의학계의 참신한 시도에 오히려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실정이라, 일본 학자들에게 더 이상 의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개념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 집단이 원어에 대한 적절한 우리말 전문용어를 먼저 제시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증대되고 있다.
새로운 우리말을 아무리 잘 만들어 냈다고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여 우리말 어휘로 공식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다. 이 경우 역설적인지는 모르지만 전문가 집단의 저항을 어떻게 설득하는가가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같은 전문가 집단에서도 음차어 선호도는 개인마다 상당히 차이가 나며 유난히 음차어를 집요하게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어 새로운 우리말 정착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음차어로 된 전문용어 사용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 듣는 일반인이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 말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즉, 음차어를 쓰면 의사소통의 효율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음차어를 오래 쓰다 보면 점차 그 음차어에 익숙하게 되어 그 말이 정말 좋은 것 같이 착각하게 된다. 따라서 초기에 원어를 우리말로 잘 번역해 사용하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이를 고치기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컴퓨터의 발달 덕에 여러 분야 사람들이 함께 조기에 토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확대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방향은 새로 나타나는 전문용어의 우리말 제작과 정착을 점차 활성화할 것이라 기대한다.
은희철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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