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구촌의 여러 나라가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양한 언어가 섞이고, 융합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경쟁력 없는 언어는 소멸되거나 변형된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앞으로 100년 안에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7,000개가 넘는 언어 중 절반 이상이 소멸할 것이고, 200년 안에 200-300개 내외의 언어만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은 어떠한가. 다행히 사용자 수를 기록해서 언어의 순위를 매기는 에스놀로그(Ethnologue)에 따르면 2019년 한국어는 7,730만 명, 15번째로 사용자 수가 많은 언어라고 한다. 터키어가 14위, 프랑스어가 16위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말은 적어도 몇백 년 안에는 소멸하지 않을 언어라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될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말의 가치나 정신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표음문자로서 한글은 다양한 소리를 문자로 표시하는 데 탁월하다. 그 결과 다양한 언어를 한글로 표시할 수 있지만, 반대로 우리말 고유의 자리와 가치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은 묘한 우리말의 운명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정부나 언론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우리말의 생명력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이다.
▲ 그림 1.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누리집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설명 내용 중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표 정책 중 하나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얘기를 해보자. ‘프로세스’란 말을 사용하다 보니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부의 ‘정책브리핑’에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이렇게 설명한다. “분단 이후 70년 가까이 지속돼 온 남북 간 적대적 긴장과 전쟁 위협을 없애고, 한반도에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정책이다. 남북한이 새로운 경제 공동체로 번영을 이루며 공존하는 ‘신 한반도 체제’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일련의 노력과 과정을 통칭한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실현 정책을 의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련의 노력과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면 ‘한반도 평화 정책’이라고 표현하고, 맥락에 따라 ‘한반도 평화 구상’, ‘한반도 평화 실현방안’, ‘한반도 평화 추진과정’이라고 적절하게 풀어쓰면 될 터인데, 왜 굳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란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사실 ‘process’란 표현은 이미 우리 사회에 곳곳에서 ‘공정’, ‘과정’과 같은 우리말을 대체해 가고 있다. 제작 프로세스, 업무 프로세스, 입법 프로세스, 행정 프로세스 등등. 어느 순간부터 좋은 우리말을 영어식 표현이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와 언론이 그것을 바로 잡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앞서서 주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어의 생명력, 생활력을 고려해 볼 때, 정부 기관의 태도는 참으로 무책임하다. 많은 사람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한반도 평화(추진 또는 실현)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과정’이 어떻게 ‘정책’이 될 수 있지? 당연하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해설을 확인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문재인 정부의 대표 정책인지도 알 수가 없다.
1999년 말 미국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조정관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임동원 통일부 장관과 협의하면서 ‘페리 프로세스’로 불리는 북한 핵문제 해결 및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포괄적 해결방안을 마련한다. 한마디로 페리의 한반도 평화 정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페리는 이를 ‘김대중 프로세스’, 특히 ‘임동원 프로세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때 ‘process’는 ‘peace process’를 의미했다. ‘평화 프로세스’란 말을 평화 정책, 평화 실현 방안, 평화 체제 구축 과정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 배경이다.
그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peace process’, ‘평화 프로세스’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평화 정책, 혹은 평화 정책 추진 과정, 평화 체제 구축 과정이라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되, 평화 정책에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고, 시민사회단체들은 평화 정책보다는 주로 ‘평화 체제 구축 과정’에 초점을 두고 사용했다. 그러나 그런 구분조차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쓰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일쑤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정치인, 관료, 학자, 심지어 사회운동가들조차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평화 프로세스’란 말을 정부 정책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햇볕 정책’, ‘포용 정책’, ‘평화번영 정책’,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이라는 우리말 표현이 공식적으로 더 부각되었고, 그 결과 ‘평화 프로세스’라는 혼용어는 그것을 보완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미국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주 업무인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나 언론에서 주로 그렇게 사용하곤 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등장 이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정책의 핵심으로 제시하면서, ‘프로세스’라는 말이 정책, 정책 추진 과정이라는 단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뒤이어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평화 정책이 실패했다고 규정하면서, 2017년 베를린 선언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전 정권과는 다른 정책 내용을 내세웠으나 그것을 담고 있는 명칭에서 ‘프로세스’라는 말은 제거하지 않았다.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에 걸친 북미정상회담은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떨어뜨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란 말 대신에 ‘한반도 평화 정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정책’이라는 말은 정책 목표와 수단을 포함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정책’은 한반도 평화의 실현이라는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배치를 포함하는 것이다.
▲ 그림 2.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누리집(www.korea.kr) 차림 모습
지금 우리나라의 여론과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정부 기관과 언론,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관성적, 의도적으로 우리말 대신 외국어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행태가 널리 퍼져 있다. 정부 정책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정책 해설’이라는 말을 놔두고, ‘정책브리핑’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지금 청와대나 서울시 등 주요 정부 기관 누리집에 가보라. 카드뉴스, 뉴스룸, 뉴딜, 포털, 데이터, 스토리, 포럼, 인포그래픽스 등의 표현이 큰 글씨로 주요 공간과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말은 우리 삶과 문화에서 살아 있는 소통의 매개체이다. 정부 기관과 언론, 학계 등이 우리말의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사랑꾼 역할을 하지 않고, 정반대로 우리말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해침꾼 역할을 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때이다. 시민들의 따끔한 감시와 질책이 필요하다.
윤영상 / 북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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