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매개체, 언어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 창세기 11장 중
위 구절은 성경 속 ‘바벨탑 이야기’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는 본래 하나의 언어를 쓰고 있었는데, 인간이 신을 이기기 위해 하늘 끝까지 바벨탑을 쌓아 올리자 신이 그들을 흩어지게 하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일치단결하던 인류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자 곧 갈등을 일으켰고, 급기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져 흩어지고 말았다.
종교와 무관하게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 수긍할 만하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끼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고, 오해를 빚거나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현재 지구상에는 6,00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하며, 이 중 1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만 해도 무려 250개에 달한다. 수천 가지의 언어가 존재하기에 수천 가지의 오해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세계의 모든 갈등이 단순히 언어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전 세계인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된다면, 적어도 언어 차이로 발생하는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은 불식되지 않을까?
만국 공용어를 꿈꾸다
만국 공용어에 대한 꿈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코멘스키와 같은 철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고민하던 문제다. 특히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세계적으로 국가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국제적으로 통용 가능한 인공어를 만들려는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도됐다. 링구아 콤뮨, 이디옴 노이트랄, 인터 링구아, 페리오, 링구아 인터내셔널, 엑셀시오로, 울라, 몬도링그보, 안티도, 로마니차트, 로마날, 메츠 보조, 옥시덴탈, 인터 글로사 등 수없이 많은 ‘인공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공어들은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문법이나 어휘가 난해하여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인공어 가운데 현재까지 거의 유일하게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 바로 ‘에스페란토(Esperanto)’이다.
‘에스페란토’는 1887년 폴란드의 안과 의사 자멘호프(Ludoviko Lazaro Zamenhof, 1859~1917)가 창안한 국제 공용어이다. 그가 국제 공용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남다른 성장 배경 때문이었다. 유태인인 자멘호프는 폴란드의 비알리스토크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이곳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지역으로 유태인,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지역인들이 각기 서로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에 갈등과 불화가 생기고 이것이 민족 간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고 생각한 자멘호프는 이 같은 환경에서 국제 공용어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언어적 재능이 뛰어나 유럽의 여러 언어에 능통했던 자멘호프는 유럽 언어들의 공통점과 장점만을 모아 예외와 불규칙이 없는 문법, 그리고 알기 쉬운 어휘를 가진 언어 ‘에스페란토’를 창안했다. 그는 ‘1민족 2언어 주의’에 입각해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끼리는 중립적이고 배우기 쉬운 ‘에스페란토’를 사용할 것을 권했다. 1954년 유네스코(UNESCO,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 총회는 세계에스페란토협회의 활동이 유네스코 목적과 이념에 일치한다고 보고 세계에스페란토협회(UEA)1)와 자문 관계를 수립했다. 현재 중국, 바티칸, 폴란드, 오스트리아, 쿠바 등 11개국에서 단파 및 위성 방송을 통해 매일 수차례씩 에스페란토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또한, 매년 유럽과 다른 지역을 번갈아 가면서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매해 10월 ‘한국 에스페란토 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일부 대학에서는 에스페란토를 정규 과목으로 개설하기도 했다.
에스페란토는 표면적으로는 특정 자연어와 친족 관계가 없는 인공어이지만 그렇다고 100% 중립적인 언어로 볼 수는 없다. 에스페란토 문법과 어휘의 대부분이 그 뿌리를 서구의 언어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발음 체계는 슬라브어의 영향을 받았고, 어휘는 주로 로망스어(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약 75%), 게르만어(독일어, 영어 등; 약 20%)로부터 차용했다. 어순은 라틴어나 그리스어처럼 비교적 자유롭지만, 영어와 동일한 주어+동사+목적어(SVO) 구조가 대부분이며 형용사가 명사 앞에 오는 경우가 많다. ‘만국 공용어’를 내걸고 만들어진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언어에 치중된 인공어라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런 공용어는 또 다른 차별과 편견을 낳을 수밖에 없다.
공용어가 가지는 힘
많은 사람들이 ‘인공어’를 실용화하여 만국 공용어로 삼고자 하는 데에 숱한 실패를 겪으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서 누리는 지위만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언어가 가지는 문화적, 정신적 파급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영어는 많은 나라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해당 국가에서는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영어권 국가들이 영어를 통해 얻는 이익은 언어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으며,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하기에 모든 인류의 소통을 위한 ‘공용어’는 단순히 효율성에 따라 ‘다수가 쓰고 있는 언어’라는 이유만으로 채택할 수 없다. 공용어가 가지는 힘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만국 공용어를 사용하면 네트워크 외부성 효과까지 더해져 인류가 번영하는 데에도 더욱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네트워크 외부성’2)이란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상품의 사용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만국 공용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상호 교류할 경우 각자 다른 방식을 채택할 때보다 이용 편리성이 더 높아지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수록 그 언어의 사용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전 세계가 함께 ‘국제 공용어’를 채택하는 것은 작게는 경제적 이익에서 크게는 전 인류의 소통과 화합을 이룩하는 일일지 모른다.
1) 세계에스페란토협회(Universala Esperanto–Asocio)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62개국에 가맹국 협회가 있고 약 120개국에 개인 회원이 있다. 한국에스페란토협회는 공식 누리집을 통해 중국, 일본, 브라질, 프랑스, 불가리아 등에 특히 에스페란토 사용자가 많다고 밝히고 있다.
2) 1950년대 미국의 하비 라이벤스타인(Harvey Leibenstein, 1922~1994)이 세운 이론으로 어느 특정 상품에 대한 수요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효과를 말한다.
※ 참고 자료
울리히 린스, ≪위험한 언어≫, 갈무리, 2013.
니콜라우스 뉘첼, ≪언어란 무엇인가≫, 살림FRIENDS, 2008.
김훈민, 박정호, ≪경제학자의 인문학 서재≫, 한빛비즈, 2012.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우리 안의 아시아 우리가 꿈꾸는 아시아≫, 해피스토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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