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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을 널리 알린 세조

튼씩이 2022. 5. 9. 12:53

 

세종대왕이 아낀 아들, 수양대군

 

세종(조선 제4대 임금)에게는 소헌왕후를 포함해 총 6명의 부인이 있었다. 왕후와 후궁을 통해 낳은 자녀는 모두 18남 4녀였는데, 그중 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알려진 자녀는 소헌왕후가 낳은 맏아들 문종(조선 제5대 임금)과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었다.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훗날의 세조로, 조선 제7대 임금이 된다. 그는 대군 시절부터 왕위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못했는데, 스스로 ‘왕이 될 만하다’고 느낄 만큼 재능이 특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는 물론, 역법, 병서에도 두루 통달했고, 풍수 또한 전문가 수준으로 실로 당대의 어떤 문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학문적 소양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또 문인 자질보다 무인 자질이 더 뛰어났는데, <세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힘이 세서 강궁을 다루었고 그 솜씨 또한 족히 명궁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세종은 문인 소양이 걸출하고 인품이 안존한 맏아들 문종에 대한 신임이 확고했고, 문종의 어린 아들인 단종(조선 제6대 임금)의 명민함도 간파하고 있었기에, 수양대군의 뜨거운 야망을 알면서도 왕세자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종은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에게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안평대군은 시와 그림에 능하고 당대 최고의 명필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 재인이었다. 세종은 어느 한쪽에 힘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수양과 안평에게 동일한 비중의 일을 맡겼으며 중요한 일의 경우 둘이 함께 맡도록 했는데, 보현봉에 올라 북극 고도를 재는 일도 맡기고, <운회(韻會)>1) 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과 세종의 수릉터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터를 잡는 일, 불당을 건립하는 일, 세종 말년에 왕명을 전하는 일 등을 그 두 사람에게 담당시켰다.

 

1) 운회(韻會) : 한자 발음사전

 

일반적으로 왕세자가 아닌 대군들은 왕권의 공고한 확립을 위해 궁에서 떠나거나 배척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세종은 재능이 탁월한 대군들에게 대소사를 맡기며 아들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그래서였을까?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단종 1년) 후 권력을 장악해 조카인 단종에게 옥새를 넘겨받아 기어코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은 정작 아버지인 세종의 뜻을 거스른 장본인이면서도, 죽기 전까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만은 절절했다.



부왕에 대한 사랑, 한글 사랑으로 이어져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훈민정음과 관련한 주요한 임무를 담당해 왔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3년이 지난 1446년에 수양대군은 세종의 명에 따라,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집필했다. 훈민정음으로 지은 최초의 산문집이었다.

 

 

 

수양대군의 《석보상절》에 감동한 세종은 직접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써서 훈민정음이 만백성의 문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그 안에 담았다.

 

왕위에 오른 후, 세조는 자신이 대군 시절에 지은 《석보상절》과 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월인석보(月印釋譜)》라는 책을 펴냈는데, 책 첫머리에는 《훈민정음》 언해본을 담아 일반 백성들이 쉽게 훈민정음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또 세조는 즉위 6년째인 1460년에 관리의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포함하도록 명을 내리고, 성균관 과목에도 훈민정음을 넣도록 함으로써 훈민정음을 읽고 쓰는 사람을 양성했다. 1461년 세조는 ‘집현전’을 없애고 ‘간경도감’을 세웠다. 간경도감에서는 불경과 같은 경전을 주로 편찬했는데, 그 불경 대부분이 훈민정음으로 쓰였으며 이때 지은 불경 언해본들은 오늘날 한글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세조는 1461년 최항, 한계희 등 30여 명에게 누에고치 등 양잠의 전 과정을 설명하는 농서인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명해 일반 농민들이 양잠 생산에 관한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세조는 신하들과 술자리를 즐겨 자주 연회를 열었는데, 술자리에서 세조에게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먼저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기녀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두텁고 하얗게 화장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어느 기녀든 차이 없이 똑같은 이미지로 만듦으로써 기녀를 여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또 아끼는 신하가 술을 따르면 기녀들로 하여금 그 신하의 이름이 들어간 주제가를 부르게 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조카 구성군과 세조의 오른팔이었던 한명회 등이 술자리 주제가로 총애를 받았다. 이처럼 기녀들에게 특별한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버릇이 있었던 세조는 말년에 과거 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의 가사를 기녀들에게 주어 노래를 부르게 하고, 부왕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1468년(세조 14년) 9월, 세조는 향년 52세로 부왕 세종의 곁으로 떠났다. 세조가 아버지 세종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욕망이 부른 비극적인 역사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훈민정음으로 쓴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을 《훈민정음》과 함께 과거 시험 과목에 포함시키고, 다양한 불경과 농서, 중국의 고시, 병서 등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보급하도록 한 세조가 아니었다면 훈민정음은 세종 대왕 당시에만 빛을 발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석보상절(釋譜詳節)》: 세종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왕명으로 석가의 일대기를 찬술한 불경언해서로, 보물 제523호이다. 1446년(세종 28년)에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의 전기를 엮게 했다. 법화경, 아미타경 등에서 뽑아 모은 글을 한글로 옮긴 것으로, 1447년(세종 29년)에 완성한 것을 1449년(세종 31년)에 간행했다. 조선 전기 언어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다른 불경 언해서와 달리 문장이 유려하여 당시 국문학을 대표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9년(세종 31년)에 세종이 직접 지은 불교 찬가로, 1963년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었다.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세종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며 지은 노래이다. 상∙중∙하 3권에 500여 수의 노래가 수록돼 있다. 이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가사(歌詞)이지만 예술적 독창성이 다소 부족하여 문학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월인석보(月印釋譜)》: 1459년(세조 5년)에 간행된 석가 일대기를 담은 책으로, 1983년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었다.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개고해 합편한 것인데, 내용은 《월인천강지곡》의 각절이 본문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의 《석보상절》은 주석으로 엮어졌다.



※ 참고문헌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8.
이성무, 《조선왕조사》, 수막새, 2011.
최정용, 《조선조 세조의 국정 운영》, 신서원, 2000.
허웅, 《역주 월인석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