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한글 위인 열전 - 한글 '가로쓰기'를 실현한 최현배

튼씩이 2022. 4. 30. 12:52

 

주시경과의 운명 같은 만남

 

최현배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나 고향인 경남 울산의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후, 1910년에 상경하여 관립한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주시경은 일요일마다 보성중학교 내 국어 강습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때 최현배는 1910년 5월부터 3년간 주시경의 수업을 듣게 된다. 주시경으로부터 한글과 국문법을 배운 최현배는 ‘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주시경의 민족주의적인 언어관에 큰 영향을 받고, 평생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의 길을 걷겠노라 다짐한다.

 

“나는 이 중등학교에 다니게 된 때부터 동향 선배 김 아무를 따라 박동 보성학교에 차린 주시경 스승님의 조선어 강습원에 일요일마다 빼지 않고 ‘조선어’를 배우러 다녔다. 이 강습원에 다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주 스승에게서 한글을 배웠을 뿐 아니라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사랑과 그 연구의 취미를 길렀으며 겨레 정신에 깊은 자각을 얻었으니, 나의 그 뒤 일생의 근본 방향은 여기서 결정된 것이었다.” 

- 최현배,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 ≪나라사랑≫ 제10집, 1973, 168쪽.

 

주시경이 주말까지 제자 양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최현배의 우리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일요일 단 하루만 식었더라도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운명 같은 만남으로 인생이 달라진 최현배는 어떤 고난에도 우리말과 우리글 연구를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역경 속에서 피어난 우리말 사랑

 

1910년 8월, 일제가 강제로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국권 피탈로 인하여 우리말은 ‘국어’의 지위를 하루아침에 일본어에 빼앗기게 되었다. 최현배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교육학을 전공하는 등 학업을 이어 갔는데, 일제 강점의 참담한 상황 속에서 우리말 연구에 강한 사명감을 갖고 국어의 문법 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말의 어법과 문법을 정리한 ≪우리말본1)≫을 쓰기 시작했다. 1926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한 최현배는 ≪우리말본≫의 저술을 계속하면서 조선어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는데, ≪한글≫지를 창간하고 ‘한글날’ 제정에 참여하는 등 우리말 사랑으로 애국을 실천했다.

 

최현배는 일제가 민족주의 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몇 번이고 음해를 받았으며 옥고를 치렀다. 최현배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2)’으로 구속되었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로 퇴직당했다. 1942년에는 ‘조선어 학회 사건3)’으로 검거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모진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최현배는 1937년 ≪우리말본≫을 출판했고,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희전문학교에서 쫓겨난 후에도 한글을 역사적․이론적으로 연구한 ≪한글갈4)≫을 지어 조선어 학회 사건(1942년)이 일어나기 직전에 출판했다.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모진 옥살이를 겪으면서도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한글 쓰기와 가로 쓰기의 시작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어만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된 후 되찾은 우리말과 우리글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자 하여도, 우리말로 된 교재가 없었기 때문에 국어와 관련한 일들이 더욱 시급해졌다. 함흥 감옥에서 해방을 맞아 서울로 돌아온 최현배는 동지들을 모아 ‘조선어 학회’를 재건하고, ‘국어 교과서 편찬 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어 교재 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우리말로 학생들을 가르칠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교원 강습회를 열었다.

 

최현배는 해방 후 한 달 만에 미 군정청 편수국장에 취임, 조선교육심의회의 교과서편찬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주도 아래에 결의된 교과서 편찬의 기본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초․중등 교과서는 모두 한글로 하되, 한자는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넣을 수 있게 했다. 둘째, 교과서는 가로쓰기를 하도록 했다. 한글 전용과 한글 가로쓰기는 일찍이 주시경과 그 제자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주장한 바 있으나, 일제의 억압 아래에서는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와 논의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출판물은 한자 표기의 비중이 컸고, 세로쓰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채택한 것은 매우 선구적인 일이었다.

 

또한 최현배는 한글로 된 제헌 헌법 제정 건의를 통해 한글 전용이 정책으로 지속되도록 노력했다. 마침내 1948년 10월 9일 한글날, “대한민국의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 얼마 동안 필요할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라는 내용의 ‘한글전용법(법률 제6호)’이 공포되었다.

 

 

최현배는 우리말 교과서의 편찬과 보급, 그리고 한글 전용 촉진 정책의 추진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 학회의 ≪큰사전≫ 편찬에도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일제 강점기 때부터 편찬이 시작된 ≪큰사전≫은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지면서 관계자들이 여럿 투옥되어 한동안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 미국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받아 1947년 10월에 첫째 권, 1949년 5월에 둘째 권이 출판되었다. ≪큰사전≫은 최현배의 문법 이론을 수용하여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표준말을 정하여 한글 맞춤법에 따라 편찬한 사전으로서 이후 국어사전의 편찬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949년 조선어 학회는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최현배는 20여 년간 상무 이사와 이사장으로서 한글 학회를 이끌었다.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1), ≪한글의 투쟁≫(1954), ≪나라사랑의 길≫(1958), ≪한글만 쓰기≫(1970) 등 20권에 이르는 저서와 100편에 달하는 논문을 발표한 최현배는 국어 교사 양성, 한글 전용 운동, 한글 정보화·기계화 운동을 전개하며 국어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우리말 연구에 전념하였다.

   

1) 1937년에 최현배가 지은 문법서. 1929년에 간행한 ≪우리말 첫째 매 소리갈 성음학(聲音學)≫에 씨갈[品詞論]과 월갈[統辭論]을 추가하여 완성한 것으로, 주시경 이래의 문법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의 문법 연구를 집대성한 저술로 평가된다. 해박하고 풍부한 용례로 이뤄진 방대한 문법서로 이후의 국어 문법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2) 일제가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 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 회원을 대거 검거한 사건. 일제가 민족주의 인사들을 단속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중 하나이다.

 

3) 1942년 10월에 일본어 사용과 국어 말살을 꾀하던 일제가 조선어 학회의 회원을 투옥한 사건.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학술 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라고 꾸며,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학회는 해산되고 편찬 중이던 국어사전 원고의 상당한 부분이 없어졌다.

 

4) 1942년에 최현배가 쓴 한글의 역사 연구서. 훈민정음에 관한 일체의 역사적ㆍ이론적인 문제를 총망라하여 한글 연구의 체계화를 추구했다.

   

   

※ 참고 자료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김석득, ≪외솔 최현배 학문과 사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