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왕실문화 인문강좌(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2)

튼씩이 2022. 6. 17. 07:52

3. 근대주권국가로서 대한제국의 국가상징물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 체제 하의 근대주권국가를 지향하는 것이었으나, 황제 즉위식을 비롯한 ‘화려한 군주’와 황실가족의 탄생 모습은 외형상으로는 일단 동양적 황제국의 복장이나 의례를 추수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황제정과 황실문화가 구래의 중화제국의 황실문화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고종이 선망했던 유럽의 근대제국의 황실문화를 추구할 것인지 그것이 1897년 10월, 어렵사리 탄생한 대한제국 황제정 앞에 놓인 선택지였다. 황제 탄신일을 만수성절(萬壽聖節), 황태자 탄신일을 천추경절(千秋慶節), 황제 즉위일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태조 고황제(高皇帝) 등극일을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로 기념일로 제정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며 축하연을 벌일 때도 그 명칭은 중국 명나라의 예에 따른 것이나, 실질적으로는 이미 왕조시대와는 다른 근대국가의 행사 모습을 체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의 황실문화에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는 한동안 동시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만국공법적 국제질서 속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한 점차 구래의 동아시아적 황제국 문화의 요소 보다는 근대적 자주독립국가로서 각종 상징물과 국가적 이미지 구축에 좀더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충군애국주의를 고취시킬 수 있는 각종 의례와 의장, 기념물, 기념식, 국가 등을 제정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점차 근대 국민국가적 외형을 체현해 가고 있었다.


우선 시각적 측면에서 황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각종 복식과 훈장, 기념장, 황실 상징 문양과 도안, 깃발, 우표나 화폐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대한제국 황제정이 도입한 많은 요소들은 봉건왕조 시대의 왕실문화가 가지는 상징성과는 사뭇 다른 작동 방식으로 대한제국의 신민(臣民) 혹은 국민들을 동원했다. 1900년 4월 반포된〈훈장조례(勳章條例)〉에서 오얏꽃은 왕실의 상징으로 공식화되었으며, 황제정 선포 초기 동양적 황제의 상징이었던 용(龍)은 점차 왕관이나 독수리와 같은 서구 제국의 영향을 받은 주화 도안 등으로 대체되어 간다. 이러한 국가 시각 상징물의 제정과 형성과정은 그대로 근대 국민국가로 가는 도정에 나타나는 산물이며 그런 측면에서 대한제국 황제정은 동양적 황제국의 문화보다는 서구 절대왕정의 표상이나 초기 근대국가 형성기의 문화적 특성을 띠고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기에는 이미 신식교육이 시작되었기에 문명개화론의 세례를 받은 인민들을 대한제국의 충량한 신민으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과 구심점이 필요했다. 즉 국기나 국가, 각종 기념일과 축하행사, 연회, 훈장, 기념우표나 엽서 발행 등을 통해 국가적 표상을 만들어 가고 이를 중심으로 근대 국민을 형성해가는 작업이었다. 이중 황제 탄신일, 황태자 탄신일, 황제 즉위일, 태조 고황제 등극일 등을 국경일로 제정한 것은 황실의 위상을 강화하여 황제권 중심으로 근대적 신민(臣民)을 만들어가려는 의도였다. 이들 국경일에는 관청과 학교, 민가에 태극기를 게양하게 하고 황제의 내탕금을 하사하여 관청과 학교, 교회 등에서 축하연을 벌이게 했다. 황제 탄신일인 만수성절이면 곳곳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는데, 대궐에서 잔치가 베풀어졌을 뿐 아니라, 소학교 학도들이 학부(學部)에 모여서 경축 행사를 가진 뒤 경운궁 대안문(大安門) 앞에 나아가 만세를 불렀고, 사람들도 거리를 왕래하며 생가(笙歌)로 축하했다고 한다. 황성신문도 8월 28일 하루는 휴간하고, 8월 29일 만수성절을 축하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황제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작업도 추진되었다. 대한제국기에 고종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어진을 제작하게 했을 뿐아니라, 서양인들에게 여러 차례 사진을 촬영하게 하여 다양한 초상 사진을 남겼다. 전통시대 궁중의 특별한 곳에만 보관했던 어진과 달리 무한정 복제가 가능한 사진은 다양한 인쇄매체를 통해 보급됨으로써 보통의 인민들이 황제의 사진을 가까이하고 자연스럽게 국가적 표상으로 이해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어사진(御寫眞)을 일본(一本)씩 노나주고 팔지는 않는다더라’는『독립신문』의 기사는 대한제국기에 황제의 사진이 일반에 보급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황제의 초상 사진은 국가적 경축일인 황제 탄신 기념 행사나 각급학교 게시용으로 보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의 탄신일에는 정부 고관과 개화인사 뿐 아니라 수많은 인민들이 참여하여 화려한 축하행사를 가진 기록들이 있다. 근대적 국민 만들기에 앞장선 『독립신문』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도 “나라마다 제왕들이 계신 데는 그 나라 임금의 탄신일이 전국 인민의 경축하는 날이라. 내일은 자주독립한 대조선 대군주 폐하의 45년 탄신일이라. 이런 경축하는 날을 당하여 조선 신민이 되어 나라 일을 생각할 때 조선 인민들이 자기의 임금께 할 직무가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는 고로 오늘 우리가 신민이 되어 해야 할 직무를 대강 말하노라...고 하면서, 8월 23일 오후 3시, 대군주 폐하 탄신 경축회를 훈련 안에서 거행했는데, 인민 천여 명이 모여 훈련 안 대청을 국기와 청, 홍, 백 삼색으로 단장하고 교우, 부인네, 정부대신, 고관들이 모여 경축하였으며,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가 개회 선언을 하고 한성판윤 이채연이 연설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화려한 탄신 기념일 행사와 어사진의 대중적 보급은 대한제국기에 각종 황제 관련 기념물, 훈장, 우표, 엽서 등과 함께 충군애국지심을 고취하고 국민적 구심점을 형성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일본의 명치(明治) 천황의 경우에도 일찍부터 각급 학교에 천황의 초상을 걸게 함으로써 국민적 구심점으로 위상을 확보해 갔듯이, 대한제국의 각종 황제 관련 표상들도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대한제국의 신민들은 국가적 행사가 열릴 때마다 나라와 황제를 상징하는 국기와 국가를 통해 자연스럽게 ‘충군애국주의’를 접하고, 일상적으로도 엽서나 우표, 어사진 등을 통해 대한제국의 국가적 상징물들을 만나는 시대가 되었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 및 망육순(望六旬; 51세)을 앞두고는 보다 근대적인 방식으로 근대 유럽 제국처럼 화려한 국제행사를 기획했다. 1896년과 1897년, 민영환을 특사로 파견했던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나 영국 여왕 60주년 기념식과 같이 유럽 제국의 국가적 행사를 모델로 각국 축하사절을 초대하여 고종 황제가 세계 각국의 원수와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함으로써 국가적 위상을 높이고 국민적 구심점을 구축하고자 했다. 일본,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 각국 인사들을 초청하고 기념식 때 나눠주기 위해 금장(金章) 1천 개, 은장(銀章) 1천 개 등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장(記念章)까지 만들었다.


훈장과 기념장을 담당하는 표훈원이 설치된 것은 1899년 7월인데, <훈장조례>에 따르면 대훈위로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과 이화대훈장(李花大勳章), 훈(勳)과 공(功)으로는 각각 8등급의 태극장(太極章)과 자응장(紫鹰章)을 두었다. 훈장은 우선 대한제국과 조약을 체결한 나라의 원수들에게 수여되었다.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 미국, 일본, 청 등 8개국 국왕과 대통령에게 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으나, 미국 대통령은 외국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례가 없다고 돌려보내기도 했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황제는 각각 답례로 훈장을 보내왔다. 즉위 기념식과 마찬가지로 훈장 역시 대한제국이 만국공법이 지배하는 근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교류하기 위한 도구였으나, 미국의 경우처럼 대한제국의 의도에 쉽사리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2년 5월에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정한 후 행궁(行宮;豊慶宮) 건설이 추진되고, 고종의 망육순과 즉위 40년을 축하하는 기념물로 환구단 앞에 석고(石鼓) 건립, 기로소(耆老所) 남쪽 현 세종로 네거리에 기념비와 비각을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되는 등 황제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각종 사업은 계속되었다. 명성황후영세감모비(明成皇后永世感慕碑) 건립운동,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위해 순사(殉死)한 홍계훈과 이경직, 그리고 갑오․을미년간 국가를 위해 죽은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장충단(獎忠壇) 건설 역시 대한제국의 신민들을 충군애국주의로 동원해내기 위해 고안된 대표적인 기념물이었다. 국가적 기념물 조성사업을 통해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민적 구심점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


대한제국기에는 시각적 국가 상징물 외에도 새로이 창설된 군악대의 양악 연주를 통해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감지하기도 했다. 신식 군대와 연계하여 서양식 나팔과 드럼으로 구성된 군악대가 고종황제의 어가행렬과 같은 행차에 선두에 서서 연주하는 모습과 선율은 그 자체가 화려한 궁중행사의 일부로서 근대국가를 알리는 청각적 효과를 냈다.


1900년 12월 19일 공표된 군악대 설치령에 따라 시위 제1연대에 군악대가 설치되었고, 음악교사로 독일인 프란츠 폰 에케르트(Franz von Eckert)가 초빙되었다. 1901년 2월 19일 내한한 에케르트는 1879년부터 1899년까지 무려 20년간, 일본에서 해군 군악대를 비롯하여 궁내성, 육군 도야마(戶山)학교, 근위군악대, 동경음악학교 등에서 양악을 가르친 공로로 훈장을 두 번이나 받은 인물이었다. 에케르트는 내한한 지 불과 6개월 만인 1901년 9월 7일, 고종황제의 만수성절에 이태리 가곡 1곡, 독일 행진곡 1곡을 경운궁 경운당(지금의 정관헌)에서 연주했다. 또한 황실의 명으로 1902년에 ‘대한제국애국가’를 작곡했고 그 공로로 훈3등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1902년 1월 27일, 고종황제는 “인심을 감동시켜 분발하게 하고 사기를 진작시켜 충성심을 돋우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데 노래보다 좋은 것이 없다. 마땅히 나라의 노래를 제정해야 한다. 황실의 학자들은 가사를 만들어 받치라”고 명하고, 가사가 완성되자 에케르트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이에 서양식 음계와 리듬을 사용하지만, 한국풍 주제에 의한 대한제국 애국가가 1902년 7월 1일 완성되었고, 8월 15일에 공식적으로 국가로 공포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애국가’는 국경일과 기타 경축일에, 황실의 국가적 행사 때, 혹은 학교에서 연주되어 충군애국지심을 고취했다. 1910년 병합 후 금지곡이 된 후에는 하와이, 중국, 러시아 등 독립운동 현장에서 가사와 선율이 조금씩 변형되어 연주되었다.


‘대한제국애국가’의 가사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ᄉᆞ”로 시작되어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로 끝나며, 플룻과 피콜로, 오보에, 클라리넷 등 화려한 관악기 편성으로 제작된 악보집은 각국 공사관과 각급 학교에 배포되었다. 무궁화와 태극으로 장식된 화려한 표지의 악보집 맨 앞에는 원수부 회계국 총장 육군부장 정1품 훈1등 민영환(閔泳煥)의 이름으로 서문이 실려 있고, 국문 가사와 독일어 가사, 그리고 악보가 실려 있다.1)

 

1)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갓치 받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시고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대한제국애국가’는 서양 각국의 음악을 참조하여 근대적인 군악대를 위한 연주곡으로 제정되었으며, 우선 군인들이 이를 연주함으로써 충애지심을 고양하고, 일반 인민들도 황제를 칭송하는 가사를 통해 충군애국지심을 기를 수 있도록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에케르트가 지도한 양약대는 날로 실력이 늘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그너의 서곡을 연주할 정도로 성장했다. 대한제국기 궁중에는 서양식 연회문화가 도입되어 서양식 만찬과 더불어 양악 연주로 에케르트가 지휘하는 군악대의 연주가 이어졌다. 주로 각국의 국가와 행진곡, 가곡, 춤곡 등을 연주했다. 에케르트 군악대의 연주 수준이 유럽의 여느 악대에 못지않다고 극찬한 서양인들이 많았으며, 황실의 공식행사는 물론, 외국인들을 위한 파티와 외교행사, 심지어 탑골공원에서 시민을 위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1902년 칭경예식을 준비하기 위해 경운궁 내 석조전 뒤편에 건립한 양관인 돈덕전에는 별도로 악실(樂室)이 설치되어 있음도 주목된다. 돈덕전은 이후에도 외국 귀빈들의 숙소나 접대장소, 서양식 연회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는 바, 연회가 열릴 때 양악대가 대기하는 장소를 별도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대적인 국제행사로서 최초로 기획된 즉위 40주년 칭경예식은 여러 차례 미뤄지다가 결국 거행되지 못했다. 재정문제와 러일전쟁 발발 위기 고조라는 불안한 대외정세로 인하여 국내 행사로 끝나고 말았던 이 기념식이야말로 고종이 추구한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황제국 군주로서의 위상이 실질적인 국권의 강화 없이는 아직 요원한 일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건립한 양관들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이 진출하면서 한국주차군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거나(대관정),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당하고(수옥헌;중명전), 일본인을 위한 연회장소 혹은 경운궁을 감시하는 초소(돈덕전)로 변용되었다. 대한제국이 근대적 황제국을 지향하며 마련한 양관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기반시설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만국공법 체제 편입을 지향하며 근대적 주권국가로서 유럽 각국에 개설한 상주 외교 공관, 각종 국제조약 가입 등도 을사늑약으로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대한제국은 미국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유럽 각국에 상주 외교관을 설치했고, 중립국 벨기에와 수교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속에서 주권을 인정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다. 1900년 파리박람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1902년 칭경예식을 성대한 국제행사로 기획한 것도 모두 근대 주권국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차지하면서 대한제국의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는 일단 좌초했다. 한국의 근대 이행기에 등장한 대한제국 황제정은 시민계층의 성장으로 극복된 것이 아니라 이민족 지배권력에 의해 강제적이고 위압적으로 해체되고, 그 자리에서 식민지적 근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