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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문과학 -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체계 확립 ‘측우기(測雨器)’

튼씩이 2022. 6. 14. 07:59

4.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체계 확립 ‘측우기(測雨器)’


삼국 시대부터 국가가 성립되고 농사가 중요한 생업이 되자 사람들은 비, 바람,구름 등 기상(氣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농경 사회에서 잦은 가뭄과 홍수에 의한 농업 및 인명 피해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특히 강우량은 농사의 풍년 또는 흉년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비의 양을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측우기가 발명되기 이전의 강우량 측정 방법은 비가 오면 흙을 파서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깊이를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방법은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측우기 발명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데, 세종 23년(1441년) 8월에 호조에서 임금께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각 도 감사(監司)가 비의 양을 보고하는 법이 있으나, 흙의 건조함과 습함이 같지 아니하고, 흙 속으로 스며든 빗물의 양이 얕고 깊음도 역시 알기 어렵사옵니다. 청하옵건대, 서운관에 대(臺)를 짓고 쇠를 부어 그릇을 만들되, 길이 2척(尺,자)에 직경(直徑)은 8촌(寸, 치)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놓고 빗물을 받아, 본관(本觀) 관원으로 하여금 비의 량을 재어서 보고하게 하고…….”


이 내용은 이전의 강우량 측정 방식이 매우 부정확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보다 과학적인 강우량 측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측우기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측우기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가 온 분량을 재는 기구로써 다른 나라보다 200여 년 앞선 1441년에 세종 대왕의 아들 문종이 고안하여 발명한 세계 최초의 우량계이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 측우기를 만들었음이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보이는데, 세종 23년(1441년) 4월 29일 기록에 “근년 이래로 세자(훗날 문종, 이름은 이향)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들어 간 깊이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강우량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라는 구절이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측우기를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측우기의 길이(깊이)와 직경(지름), 모양 등 제원을 알 수 있는 기록은 1441년(세종 23년) 8월 18일의 「세종실록」권 93, 4번째 기사에 실려 있다. 이는 깊이 2자(尺), 지름 8치(寸)의 원통형 우량계를 발명함으로써 비가 내리는 자연 현상을 기기(機器)를 써서 수량으로 측정하는 과학 방법이 세계에서 처음 시작되는 그야말로 기상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측우기는 주철 또는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의 측우기 본체와 이를 안치하기 위하여 돌로 만든 측우대(測雨臺), 그리고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기 위한 자(주척을사용함)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종실록』의 1442년(세종 24년) 5월 8일자 기록을 보면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 본관(本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 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와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 내용으로 보아 비가 온 양을 재는 기구인 우량계를 ‘측우기’라 이름하고, 높이가 1척 5촌(32㎝), 지름이 7촌(15㎝)으로 개량되었음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측정 방법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잰다.
• 자(尺)는 주척(周尺, 한 자가 21.27cm)을 쓴다.
• 비가 내리고 갠 일시를 기록한다.
• 물의 깊이는 척(尺, 자), 촌(寸, 치), 푼(分)까지 정확하게 잰다.


이 방법은 거의 완벽하여, 지금의 단위로 보아도 약 2mm 단위까지 측정된다. 이 때부터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은 각 도와 군·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집계된 강우량을 중앙에 정기적으로 보고함으로써 전국에 걸친 강우량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세종대왕 때 측우기의 발명 이후 강우량을 재는 제도는 100여 년 동안 잘 시행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측우기의 유실 등으로 강우량 측정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기는 1세기 반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며, 조선의 문예 부흥기인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다시 체계화되었다. 1770년(영조 46년) 5월에 세종 때의 기록에 충실하여 청동으로 측우기를 다시 만들었는데, 돌로 만든 대에는 측우대(測雨臺)라 새기고, 제작한 연·월을 기록해 놓았다. 현재 기상청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1770년에 만든 측우기 가운데 하나이다(현재는 측우대만 남아있다.).


이로써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 제도는 다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240여 년의 연속적인 강우량 관측 기록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값지고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이러한 측우기 유물은 현재 충청도의 공주에서 사용되었던 충청감영 측우기(1837년 제작, 국보 329호, 기상청)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실되고 없으며, 측우기를 올려놓는 측우대도 5개밖에 남아 있지 않다. 특히 공주 충청감영측우기는 원래 충청남도 공주에 있던 것이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다시 반환된 과학 문화재이다. 이 측우기는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있다. 마디 부분은 상·중·하 3단으로 분해할 수 있으며, 사용할 때는 꼭 맞게 조정해 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강우량 측정의 정밀성과 취급의 편리성, 그리고 온도 변화에 따른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정밀하게 설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측우기는 1770년부터 현재까지 240여 년간 연속적인 강우량 관측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로서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우리나라의 강우량의 변화, 다시 말해서 연중 강우량, 가뭄, 홍수 등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의 변화를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동북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기상의 변화를 예측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측우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세계의 과학 문화 유산으로 조선의 획기적인 발명품인 측우기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Benedetto Castelli)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특히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아직 싹트지 않았을 때 우리 조상들은 측우기를 만들고, 이를 전국의 관청에 설치해 조선의 강우량 통계 측정 체계를 확립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