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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대리청정 (1)

튼씩이 2022. 7. 18. 07:56

세자의 대리청정

 

김문식 (단국대)

 

1. 왕위 계승을 공식화하는 의식

 

국왕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인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를 생전에 지정해 두었다. 이들은 국왕의 아들, 손자, 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선발되었고, 국왕이 주재하는 책봉식을 통해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로 공인을 받았다. 국왕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비중이 높은 사람은 왕세자였다.

 

왕세자와 관련된 의식에는 왕세자 책봉식, 왕세자가 성균관에 가서 교육을 받는 입학식,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는 대리청정이 있었다.

 

다음의 <>는 왕세자들이 책봉, 입학, 관례, 가례(혼인), 대리청정을 한 나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왕세자들은 대부분 10세를 전후하여 책봉, 입학, 관례를 연속적으로 거행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나이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27~30세 사이가 가장 많았다.

 

 

 

2. 왕세자의 대리청정

 

대리청정이란 국왕이 늙거나 중병이 들어 국정을 담당하기 어려울 때, 국왕의 후계자가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ʻ청정(聽政)ʼ이란 국왕이 각종 국정을 듣고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국왕이 국정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우선 신하들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야 했으므로 ʻ들을 청ʼ자를 사용했다. 국왕의 정치를 청정, 왕세자 등이 대신하는 정치를 대리청정이라 한다면, 어린 국왕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어른이 대신하는 정치를 수렴청정이라 했다. 대왕대비나 왕대비 같은 왕실의 어른들이 국왕의 뒤에서 주렴을 드리우고 하는 정치라는 의미였다.

 

조선 시대의 대리청정은 여섯 번의 사례가 있었다. 세종 대에 왕세자 문종, 숙종 대에 왕세자 경종, 경종 대에 왕세제 영조, 영조 대에 왕세자 장헌세자(장조)와 왕세손 정조, 순조 대에 왕세자 효명세자(익종)가 그 주인공이다. 선조는 왕세자 광해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명령을 여러 번 내렸지만, 실제로 대리청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다음의 <>는 대리청정을 한 왕세자와 나이, 대리청정 기간을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장헌세자는 가장 어린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고 그 기간도 가장 길었다. 정조는 대리청정 기간이 가장 짧았고, 장헌세자와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도중에 사망하여 국왕에 즉위하지 못했다.

 

대리청정이 처음 실시된 것은 세종대였다. 1442(세종 24)에 세종은 동궁에 첨사원을 설치하고 왕세자 문종에게 국왕의 업무를 대신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왕세자는 29세의 성인이었고, 세종은 눈병 때문에 문서 처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문종이 대리청정을 시작한 것은 1443년이었다. 세종은 명나라 태자가 태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했던 것을 근거로 왕세자에게 남면(남쪽을 바라보고 앉음)하여 조회를 받고 국정을 대행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국왕만이 남면을 할 수 있다고 이를 반대했다. 결국 세종은 왕세자가 동쪽에 앉아 서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남면하는 것은 국왕이 정사를 듣고 판단하는 자리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남면하여 여러 신하의 조회를 받는데, 동궁이 어찌 감히 지존처럼 남면하고 조회를 받겠습니까? 제왕의 자리는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으면 뭇별이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동궁이 오늘은 북면하여 전하에게 조회를 드리고, 내일은 남면하여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다면 일의 형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1449년에 세종은 다음의 세 가지 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국정을 세자에게 일임했다. 이를 보면 왕세자는 국왕 업무의 대부분을 대리했다.

 

1) 사대와 제향에서 따로 의논할 일

2) 군대를 움직이는 일

3) 당상관을 임명하고 죄주는 일

 

왕세자 경종의 대리청정은 세종 대의 규정을 근거로 했다. 1717(숙종 43) 7월에 숙종은 왕세자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숙종의 왼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른쪽 눈도 물체를 희미하게 보는 정도였다. 8월에 대리청정의 절목이 완성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왕세자 처소는 시민당으로 하고, 조참이나 인접 등의 일도 이곳에서 한다.

2) 청정을 할 때 좌향은 서향이다.

3) 처음 청정을 할 때 조참을 한 번 하고, 상참은 일이 없을 때 한다. 신하들이 절하는 것은 세종 대에 정해진 것을 따르고, 종친과 문무 관리 중에서 1품 이하의 관원들은 뜰아래에서 두 번 절하고 왕세자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종실의 백부와 숙부, 사부는 먼저 건물 안에 올라가서 두 번 절하고 세자는 답배를 한다.

4) 제향은 세종 대에 정해진 것을 따라 종묘와 산릉은 모두 세자가 대행한다. 제사를 지낼 때 국왕이 직접 제사하는 예를 따른다.

5) 5일마다 빈청에 모이는 대신과 비변사의 신하들은 시민당에 들어가 만난다. 담당 승지는 서연에 참석하는 이외에 청정하는 날 승지를 불러 만날 때에도 참석한다. 승지가 참석할 때는 한림과 주서도 한 명씩 따라 들어간다.

6) 정무를 처리하는 것은 세종 대 예를 따른다. 사람을 등용하는 것, 군대를 동원하는 것, 형벌을 주는 것은 국왕이 직접 판단하고 나머지 서무는 모두 세자가 처리한다.

7) 상소나 계사 중에 사람을 등용하는 것, 군대를 동원하는 것, 형벌을 주는 것에 관한 일은 별도로 써서 국왕에게 보고한다. 내관 외관의 교체나 파직에 관한 것은 모두 보고한다. 이조와 병조의 임명, 대소 관원의 교체, 의금부와 형조의 큰 범죄의 처결, 병조 소관인 내외 군병의 당번과 훈련, 새해 초 숙위군의 교체, 군호, 궁성과 도성 문의 개폐에 관한 것은 모두 보고한다.

8) 세자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은 세종 대의 사례를 따라 청정하는 날부터 승정원에서 주관한다. 시강원에서 거행하던 것은 예조에서 거행한다. 명령을 내리는 것은 휘지라 하고, 국왕이 계의윤(啓依允)이라 하는 것을 왕세자의 달의준(達依準)으로 고치고, 계사(啓辭)를 달사(達辭), 장계(狀啓)를 달(達), 계본(啓本)을 신본(申本), 계목(啓目)을 신목(申目), 상소(上疏)를 상서(上書), 백배(百拜)를 재배(再拜)로 고친다. 문서로 보고하여 거행한 것은 승정원에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뽑아서 기록하여 보고한다.

9) 조하 등의 의주는 예조에서 세종 대에 결정한 것에 의거하여 새 방식을 만든다. 의장과 숙위하는 군사는 병조에서 세종 대에 결정한 것에 의거하여 평소보다 수를 늘린다.

 

이를 보면 왕세자가 처음 대리청정을 할 때 조참을 한다는 규정이 있다. ʻ조참ʼ이란 국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회의 하나로 매월 1, 6, 11, 16, 21, 26일에 거행하는 조회이다. 이와 구분하여 매일 거행하는 조회는 상참이라 한다. 조참은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행해진 조회이다. 국왕이 정기적으로 거행했던 조참을 왕세자가 거행하는 것은, 왕세자가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고식이었다.

 

국왕과 왕세자의 조참의식을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국왕은 남쪽을 향하는 건물의 북쪽에 앉아 남면을 했지만, 왕세자는 서쪽을 향하는 건물의 동쪽에 앉아 서면을 했다. 국왕만 남면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국왕의 조참에서는 건물 안에 국왕의 자리만 있었지만, 왕세자의 조참에서는 종실백숙, 친왕자군, 사부, 이사, 1품 이상 대신들의 자리가 있었다. 이들이 왕세자에게 절을 할 때에는 왕세자도 답배를 했다. 왕세자가 종실의 어른과 스승을 우대하는 조치였다. 또한 관리들은 국왕에게는 네 번 절을 했지만 왕세자에게는 두 번만 절을 했다. 조참은 왕세자가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존귀한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조참의식에는 국왕과 왕세자 사이에 위상의 차이가 있음이 반영되고, 집안 어른과 스승을 우대해야 한다는 의식이 반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