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나는 직접 만든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체포되었습니다.”
교육부가 만든 국정교과서 홍보 광고는 유관순 열사의 관점에서 3·1운동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부모님이 일본 헌병에게 피살된 이야기와 서대문형무소에서 매질과 고문을 당한 이야기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배경음악이 꺼지고 한 여학생이 뚱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검정제인 지금의 역사교과서에 유관순의 이름과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 이 광고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끝난다.
광고를 보면 볼수록 정말 잘 만들었다 싶다. 독립운동의 상징이라 할 유관순을 동원한 것도 훌륭한 전략이지만, 자신들의 약점을 국정교과서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는 그저 감탄만 나온다.
대통령이 갑자기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이유는 추측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과오를 미화하기 위함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자원해 일본을 위해 싸운 분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밀기는 좀 부담스럽다. 비단 박정희 대통령 말고도 우리나라 보수세력이 추종하는 분들은 대개 친일의 경력이 있는지라,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은 우리나라의 건국시점을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대신 1948년 정부수립으로 하려고 한다. 그래야 친일파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고,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되니 말이다. <친일인명사전>을 각 학교에 배포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칠 정도로 친일에 관대한 보수세력이 ‘독립운동을 위해 애쓴 이를 잊지 않겠다’며 유관순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기가 막히지 않는가? ‘유관순에 대해 초등학교에서 다 배워서 넣지 않았다’는 진보 측의 말이 치졸한 변명으로 느껴질 수밖에.‘김일성 주체사상을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는 식의 선동도 기가 막힌다. 실제 교과서에서 북한 관련 내용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주체사상도 비판적으로 기술돼 있지만, 저런 선동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교과서를 훑어보며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볼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진보세력이 뒤늦게 “사실과 다르다”고 우겨보지만,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라 뒷북에 그친다. 비단 요즘만의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종부세가 부과됐을 때 보수언론은 ‘세금폭탄’이란 용어를 쓰며 반대를 표시했다.
종부세가 상당액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부과될 뿐 서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그 표현은 종부세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의 구미를 끌어당기는 선동에 능하다는 것, 앞으로도 보수의 시대가 계속될 것 같은 이유다.
영악한 전략도 전략이지만, 보수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건 콘크리트 같은 지지층의 힘이 크다. 더 무서운 건 이 지지층 중 상당수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점. 예를 들어보자. 며칠 전 발표된 국정교과서 여론조사 결과 반대가 52.6%, 찬성이 42.8%였다. 반대가 더 많긴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국정화에 40%가 넘는 이들이 찬성한 게 더 불가사의다. 아마도 이들은 교과서 국정화를 문재인이 주도했다면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와 반대시위를 했으리라.
노무현 대통령 시절을 생각해 보자. 보수는 당연히 노무현을 물어뜯었지만, 노 대통령에 대한 진보세력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2006년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5%대까지 떨어진 것도 진보세력이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층은 그런 생각 자체가 없다. 국정수행 지지도를 무슨 대선투표 정도로 아는지라 대통령이 아무리 삽질로 일관해도 무조건 ‘잘한다’를 선택한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늘 50%에 육박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정치라는 게 원래 지지층을 빼앗아 오는 게임일진대, 생각 자체가 없으니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진중권 교수가 다음과 같이 한탄한 것도 이해가 된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길 수가 없다.”
세상에 많은 대통령이 있겠지만, 박 대통령만큼 행복한 대통령은 드물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지시만 하면 참모들이 신출귀몰한 전략을 짜주고, 콘크리트 지지층은 그게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될지언정 열정적으로 옹호해 준다. 아무리 삽질을 해도 선거는 다 이기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은가? 이건 비단 박 대통령뿐 아니라 앞으로 대통령이 될 보수인사들에게도 해당되는 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보수 대통령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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