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어에만 ‘억울하다’가 있을까?”
어떤 사회에 있는데 다른 사회에는 없는 단어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이 목욕탕에서 미는 ‘때’에 해당하는 한 단어가 영어에는 없다. 영어로 때를 표현하려면 ‘dirt and dead skin cell’이라는 식으로 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영어권 사회 사람들의 몸에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를 미는 문화가 없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사람들을 억울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다른 문화권보다 더 자주 발생하는 걸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세계를 사유하는 수단이 된다. 어휘가 풍부하다는 것은 세계를 보는 시선이 넓다는 뜻이며, 단어를 명징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사물을 예리하게 분별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언어에 대한 관심은 꼭 말을 잘 하거나 글을 잘 쓰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 단어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일, 그 기원과 변천과 쓰임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특정한 모국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시야를 넓히고 사고의 단계를 끌어올린다.
이 책은 한국인으로 살아오면서 수없이 주고받았던 단어들을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듯이 낯설게 바라본다. 단어를 실마리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생각을 소리에 실어내는 방식을 포착해 풀었다. 저자 백우진에게 단어는 20여 년간 활자 매체에서 기사를 쓰는 내내 ‘말동무’ 같은 존재였다. 시간이 빌 때마다 약 2,400쪽인 사전을 한 단어 한 단어 읽으면서 눈에 띄는 표제어를 적어나갔다. 그러다 자주 쓸 만한 우리말 단어를 모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채운 메모를 간직하며 우리말을 궁리했다. 이 책은 그렇게 언어를 탐식(貪識)하기에 이르러온 과정에 관한 저자의 보고서(寶庫書)이기도 하다.
단어의 ‘사연들’은 그래서 흥미롭다. 사연을 듣다 보면, ‘어떤 영역에 관심을 둘 경우 대개 보통 수준을 넘어선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의 단어 사랑에 수긍하게 된다. 단어가 탄생한 배경을 추적해보는 일, 단어가 조합되는 원리를 탐색해보는 일, 사라진 단어들을 기억해보는 일은 단지 ‘단어에 관한 일’이 아니다. 하나의 단어를 붙잡으면 그로부터 하나의 우주가 걸려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의 독자가 언어를 사색하는 일이 인문학의 입구라는 것,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단어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무엇’을 말해준다는 것을 실감하기를 바란다.
이 책은 먼저 다른 언어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말 고유의 ‘맛이나 무늬’를 찾아본다. ‘단어가 공간에 녹아든 사연’이다. 언어는 그 사회를 비춰서 보여주는 거울이므로 한 사회의 낱말이 그 사회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말의 ‘잘코사니’가 그런 실마리가 되는 단어다. 잘코사니는 ‘미운 사람이 불행을 당한 경우에 고소함’을 뜻한다. 영어나 일본어에는 잘코사니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독일어에는 ‘Schadenfreude’가 있다.
이 책의 둘째 부분은 ‘단어가 오래전 태어난 사연’, 즉 유래를 찾아본다. 한 사회의 언어에는 그 사회의 발자국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한자에서 출발해 우리말로 들어오고 세계적으로도 확산된 단어의 여정을 들려주기도 한다. 출발 단어는 ‘확(?)’이다. ?은 ‘가마솥’을 가리키고, 간체자로는 ‘?’으로 쓴다. 이 한자어의 광둥어 발음이 ‘웍’이다. 웍은 오늘날 세계 전역의 주방에서 쓰이며 영어로는 ‘wok’로 표기된다. 확은 우리말로 넘어와서는 ‘돌확’ 등이 됐다.
셋째 장은 우리말의 조어 방식, ‘단어가 헤치고 모여든 사연’을 짚어본다. 그중 하나가 우리말에는 끝부분이 같은 단어의 묶음이 많다는 것이다. ‘깨비’로 끝나는 낱말에는 도깨비, 허깨비, 진눈깨비, 방아깨비 따위가 있다. 이렇게 단어를 묶어서 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예컨대 ‘깨비’는 주변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데 붙는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장은 ‘단어가 그동안 숨었던 사연’이다. 곱고 귀한데 쓰이지 않았던 말들을 골라놓았다. ‘도사리’ 같은 낱말들이다. 도사리는 ‘다 익지 못한 상태에서 떨어진 과실’을 뜻한다.
우리말 언중은 의태어 중에서도 준첩어를 즐겨 쓴다. 첩어는 ‘고래고래’처럼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만든 단어다. 준첩어는 ‘눈치코치’처럼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대신 한 음절을 바꿔서 말맛을 살린 낱말이다. 따라서 준첩어는 한글 표기를 기준으로 네 글자 이상으로 만들어진다. 옹기종기, 올망졸망, 아기자기, 들락날락, 들쭉날쭉, 아웅다웅, 곤드레만드레, 미주알고주알, 휘뚜루마뚜루 등이 준첩어다.
세계 모든 언어에는 첩어가 있고, 많은 언어에는 준첩어도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한자어에는 좌지우지, 이판사판, 설왕설래 같은 준첩어가 있다. 우리말의 준첩어 발달에는 한자어도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말과 가장 비슷한 일본어에도 준첩어가 있는데, 우리말만큼 다양하지는 않다고 한다. 영어에도 ‘mishmash(뒤죽박죽)’ 같은 준첩어가 여럿 있지만 한국어에 비해서는 덜 쓰이는 것 같다. - 8쪽 -
한국에는 일본과 영어권에는 없는 ‘억울하다’라는 낱말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유독 억울해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비슷한 상황에서 한국 사람들이 유독 억울해하면서 이 단어가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한국 사회에는 사람들을 억울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구조나 문화로 인해 억울한 경우가 다른 사회보다 더 자주 발생해왔다고 봐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시대대로,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강점기대로, 독재시대에는 독재시대대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수탈하고 고문하고 처벌하고 죽이며 억울하게 했다. 어느 사회 사람들의 타고난 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억울해하는 사람들을 줄이려면 억울하게 만드는 제도와 문화를 없애야 한다. - 24쪽 -
넉점박이는 서(庶)에서 나온 단어다. 서(庶)는 서출(庶出), 즉 첩의 자식이나 자손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글자의 아래 점이 넷 찍혔다는 데에서 넉점박이라는 말이 나왔다. 벽초 홍명희는 저서 《학창산화(學窓散話)》에서 넉점박이의 어원을 이렇게 설명하고 서출을 부르는 ‘좌족(左族)’ ‘초림(椒林)’ 등 다른 말을 전한다. 벽초는 “좌족(左族)이란 사도(邪道)를 좌도(左道)라 하고, 강직(降職)을 좌천(左遷)이라 하는 것과 같이 존우비좌(尊右卑左, 오른쪽을 높이고 왼쪽을 낮춤)에서 나온 말”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초림(椒林)이란 후추의 맛으로 서얼의 ‘얼’ 음(音)을 비유한 언어”라고 풀이한다. 초림(椒林)은 사림(士林)을 흉내 내 지어낸 말이다. 사림은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를 뜻하고 초(椒)는 후추나무 또는 산초나무를 뜻한다. 후추나 산초는 얼얼한 맛을 낸다. 초림은 ‘얼림’, 즉 서얼의 무리를 이르는 것이다. 서얼과 관련해서는 이 밖에 ‘한 다리 짧다’라는 은어를 썼다. - 99~100쪽 -
도토리는 도토리나무에서 열리지 않는다. 도토리나무가 있는 게 아니라, 참나무류의 열매를 모두 도토리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참나무류에는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등이 있다. 산의 쌀이자 보리, 밀에 해당하는 열매가 도토리다. 도토리는 산에 사는 많은 동물의 양식이다. 도토리거위벌레 같은 곤충에서부터 다람쥐, 어치, 멧돼지, 곰 등 들짐승과 날짐승이 가을에 배 불리고 겨울을 나는 식량이다. 겨울에 대비해 다람쥐와 어치는 도토리를 땅속에 저장해두고, 멧돼지와 곰은 몸에 지방 형태로 저장해둔다. (중략) 스페인 요리 중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건조한 요리인데, 고급 하몽은 야생에서 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에서 나온다. (중략) 돼지는 도토리를 잘 먹는다. 도토리라는 이름도 돼지에서 나왔다. 잠시 돼지의 옛 이름 ‘돝(돋)’을 돌아보자. 돼지 새끼는 강아지·송아지·망아지처럼 돝아지였다가 도야지로 변했다. 모자(母子) 단어인 ‘돝-도야지’ 중에서 언젠가부터 돝이 덜 쓰이다가, 도야지만 남아 돼지가 되더니 이윽고 돼지가 돈(豚) 성체를 가리키게 됐다. 최세진이 16세기에 펴낸 《훈몽자회(訓蒙字會)》는 도토리를 ‘돝의 밤’, 즉 돼지가 먹는 밤이라고 풀이했다. - 101~102쪽 -
‘난부자든거지’는 겉으로는 부자 같지만 실속은 거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반대로 ‘난거지든부자’는 겉으로는 살림이 형편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유한 사람이다. 든벌은 집 안에서만 착용하는 신이나 옷이고, 난벌은 나들이 옷이나 신이다. 든벌과 난벌을 함께 이르는 말이 ‘든난벌’이다. 든바다는 육지로 둘러싸이거나 육지에 가까운 바다, 난바다는 뭍으로 둘러싸이지 않거나 뭍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를 뜻한다. - 142쪽 -
자투리는 마르고(재단하고) 남은 천 조각이다. 작거나 적은 부분도 자투리라고 부른다. 자투리땅은 구획정리를 한 다음 남은 좁은 땅이다. 나투리는 충청도 사투리인데, 우수리를 뜻한다. 우수리는 잔돈이고, 마투리는 뭘까. 곡식의 양을 섬이나 가마로 잴 때, 한 섬이나 한 가마를 채우지 못한 양을 마투리라고 한다. - 170쪽 -
도사리는 익는 도중에 바람이나 병 때문에 떨어진 열매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한자말로는 낙과(落果)라고 한다. 감또개는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담을 가리킨다. 똘기는 채 익지 않은 과일이다. - 20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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