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고종 32) 11월 15일 김홍집내각은 어른이 된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되어 반일의식이 한층 높아진 상태에서 단발령은 백성 사이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라'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한 말로 “너의 몸과 터럭(털), 그리고 살갗은 모두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니라.”라는 윤리의식이 뿌리 깊었던 유생들에게는 목숨을 내놓으라 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고종과 태자가 압력에 못 이겨 상투를 잘랐지만,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 직을 사임하였고, 당대 유림의 으뜸 인물 최익현 선생을 잡아 와 상투를 자르려 하자, 그는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라고 단발을 단호히 거부하였지요. 또 미처 피하지 못해 강제로 상투를 잘린 사람들은 상투를 주머니에 넣고 통곡했으며, 단발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거나 지방으로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자르는 대신 머리 자르기 전 초상 사진을 찍거나 초상화를 그려 안방 벽이나 출입문 위에 소중히 걸어놓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 단발령을 내리자, 양반들은 상투를 자르기 전 사진을 찍어두었다.(그림 이무성 작가)
드디어 온 나라 곳곳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에 정부에서는 친위대를 파견하여 각지의 의병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이 틈에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김홍집 등 일부는 살해되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도망가 온건개화파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말았지요. 김홍집내각은 “위생에 이롭고 일하기 편리하다.”라는 그럴싸한 까닭을 내밀었지만, 설득이 안 된 강요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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