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꽃이 말에서 피어난다는 사실은 지난 삼천 년 동안 끊임없이 탈바꿈하며 새로워진 서유럽 문명의 역사가 증명한다. 사람들은 서유럽 문명의 뿌리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 말한다. 이들 두 뿌리는 모두 유프라테스ㆍ티그리스의 쐐기글자 문명과 나일의 그림글자 문명을 아우르며 자랐으나, 저마다 아주 다른 빛깔의 삶으로 꽃을 피웠다. 헬레니즘은 이승을 꿰뚫어 보면서 꽃피운 헬라말(그리스말)의 문명이고, 헤브라이즘은 저승을 꿈꾸면서 꽃피운 히브리말의 문명이다.
저승에 매달린 헤브라이즘은 이승에 매달린 헬레니즘의 현세 문명과 겨루기 어려웠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서유럽 문명의 뿌리는 헬레니즘으로 보인다. 그런 헬레니즘은 소리글자를 앞장서 가다듬어 기원전 8세기부터는 헬라말을 글말로 적으며 서유럽 문명의 뿌리로 자리 잡았고, 기원전 4세기까지 더욱 쉬운 소리글자에 헬라말을 담아 놀라운 삶의 꽃으로 지중해 문명을 이끌었다.
그런 서유럽 문명의 중심이 기원 어름에 헬라말에서 라틴말로 옮겨 갔다. 그러면서 소리글자도 ‘로마자’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더욱 쉽게 가다듬어지고 라틴말을 글말로 담아내면서 라틴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게다가 헤브라이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업고 여기로 건너와서 헬레니즘과 손잡고 서유럽 문명의 참된 뿌리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일어난 문명이 앞에서 말한 중세 보편주의를 이루고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각국 문명에게 중심을 건네줄 때까지 지중해를 주름잡은 라틴 문명이다.
그러나 즈믄 해(일천 년) 넘게 서양 문명의 횃불이었던 라틴 문명도 기원 어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라는 서사시가 나오기 이전에는 그리스 문명 앞에 한갓 쓰레기로 업신여김을 받았다. 헬라말로 적힌 그리스 문명을 이백 년 넘도록 라틴말로 부지런히 뒤치며 갈고닦은 다음 기원 어름에 와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가 나타나자, 쓰레기가 금싸라기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라틴말로 일구어내는 라틴 문명이 활짝 피어오를 수 있었다.
▲ 유럽은 각 나라 말을 갈고 닦아 라틴말 대신 학문말이 되었다.(그림 이무성 작가)
서유럽 문명의 중심은 라틴말에서 다시 각국 말로 옮겨 갔다. 14세기에 이탈리아말이 라틴말을 밀어내는 것을 비롯하여, 16세기부터 스페인말, 프랑스말, 영국말이 라틴말을 잇달아 밀어내면서 서유럽 문명은 중세를 벗어나 이른바 르네상스로 넘어섰다. 그리고 15세기에서 16세기에는 이탈리아말이, 16세기에서 17세기에는 스페인말이, 17세기에서 18세기에는 프랑스말이, 18세기에서 19세기에는 영국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유럽 문명의 중심 노릇을 하면서 근대 사회를 거쳐 현대로 넘어왔다.
여기에 19세기에야 눈을 뜨고 깨어난 독일말이 뒤늦게 합류하여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서유럽 문명은 땅덩이를 온통 뒤덮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서유럽 문명의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 가서, 오늘날은 미국말이 지구 가족의 문명을 이끌어 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라틴말이 서유럽 문명의 중심으로 떨치며 꽃피우던 일천 년의 중세에, 이들 각국 말은 모두 농사짓고 장사하고 고기잡이하는 사람들의 하찮은 입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마다 힘껏 갈고닦아서 남다른 빛깔을 뽐내며 서유럽 문명의 중심으로 자랑스럽게 꽃피었던 것이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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