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은 왜 하는 것일까? 거짓말의 첫걸음은 스스로를 지켜서 살아남으려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사람뿐 아니라 목숨 있는 모든 것은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켜서 살아남으려고 안간 힘을 다한다. 그런 안간힘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마땅한 길을 찾아 익히며 살아남는다. 거짓말은 사람이 스스로를 지켜서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며 찾아낸 속임수 가운데 맨 첫걸음이다.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에 무엇보다 먼저 거짓말을 방패로 삼는다. 세상이 저를 못살게 군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사람은 맨 먼저 거짓말이라는 속임수로 스스로 지키려 든다. 이러한 것은 말을 마음대로 하고 들을 수 있으며 집 밖에 나가서 이웃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이 무섭다는 것을 배우는 때, 곧 너덧 살 때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거짓말은 이런 첫걸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짓말의 둘째 걸음은 속임수가 먹혀들어 갔을 적에 돌아오는 야릇한 기쁨을 맛보려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나 참기 어려운 괴로움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을 적에, 세 치 혀로만 내뱉는 손쉬운 거짓말 한마디로 거뜬히 거기서 벗어 나면 그때 돌아오는 기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야릇한 기쁨을 맛보려는 둘째 걸음의 거짓말은 사람의 마음에 맺힌 고(매듭이 풀리지 않게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맨 것)를 풀어 주는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거짓말의 셋째 걸음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맞수를 이기고야 말겠다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맞수에게 골탕을 먹이고 헤어날 수 없을 만큼 깊은 구렁에 밀어 넣으려는 마음으로 꼼꼼하게 덫을 놓아서 꾸미는 거짓말이다. 이런 셋째 걸음의 거짓말은 마침내 맞수의 목숨을 끊어서 죽이는 데까지도 나아갈 만큼 끔찍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겨냥하여 빚어지는 것이기에 가장 무서운 것은 아니다.
거짓말의 마지막 넷째 걸음은 욕심을 채우고 욕망을 이루려는 뜻으로 수많은 사람을 속임수로 사로잡으려는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은 사람이 예로부터 마음을 사로잡히고 올무처럼 얽매여 살아온 돈과 힘을 움켜쥐고 휘두르고 싶은 마음에서 내뱉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하도 그럴듯하게 꾸며 내는 바람에 듣는 사람들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종잡기 어렵다. 이런 거짓말이 무서운 까닭은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함께 거짓말을 하는 사람까지 함정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말에 맛 들이면 버릇이 되어 그것이 거짓말인 줄을 잊어버리고 뉘우칠 수조차 없게 된다.
거짓말은 이렇게 사람이 자라나는 것과 더불어 한 걸음 한 걸음 자라나는 것이다. 자라나면서 거짓말은 속살과 속내가 아주 다른 두 가지로 갈라진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거짓말과 남을 이기려는 거짓말이라는 두 갈래가 그것이다. 앞에서 말한 첫째와 둘째 걸음의 거짓말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거짓말이고, 셋째와 넷째 걸음의 거짓말은 남을 이기려는 거짓말이다. 앞의 둘은 어 쩔 수 없이 하는 거짓말이고, 뒤의 둘은 마음을 먹고 하는 거짓 말이다.
앞의 것은 이렇다 할 헤아림도 과녁도 없이 엉겁결에 하게 되는 거짓말이고, 뒤의 것은 곰곰이 헤아리고 과녁을 세워 이런저런 셈판을 두드려 보며 하는 거짓말이다. 앞의 것은 남을 못살게 굴려는 뜻이 없는 거짓말이고, 뒤의 것은 남을 못살게 하려는 뜻을 지니고 하는 거짓말이다. 이렇게 거짓말은 자라나면서 갈수록 거칠어지고 사나워진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속담이 거짓말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셈이다.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거짓말뿐 아니라, 말은 모두가 그냥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다. 크거나 작거나 주고받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자취를 남기고 사라진다. 사람의 몸과 마음에 자취를 남긴다는 말은 크거나 작거나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을 뜻한다. 알다시피 크거나 작거나 사람이 바뀌면 그것은 곧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만들고 바꾸는 임자이며 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짓말은 말 가운데서도 주고받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 가장 커다란 자취를 남기는 말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면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거짓말의 크기와 깊이만큼씩 바뀐다. 사람이 바뀌니까 마침내 세상도 그만큼씩 바뀌는 수밖에 없다.
거짓말은 우선 듣는 사람을 바꾼다. 거짓말을 듣는 사람은 먼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한 사람에게서 거짓말을 거듭 들으면 언젠가는 거짓말을 한 사람에게 아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만다. 한번 그렇게 딱지를 붙이고 나면 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으려 하다가 마침내 다시는 그와 마음을 주고받지 않으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울과 담을 쳐 버린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어찌 한두 사람뿐이겠는가! 그러니 이 사람에게도 거짓말쟁이 로 딱지를 붙이고, 저 사람에게도 거짓말쟁이로 딱지를 붙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 하는 데까지 이르고 만다. 그러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울과 담을 높이 쌓아 스스로 갇혀 버리고, 온통 세상이 거짓말쟁이들만 우글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보여서 웃음을 잃고 삶의 빛도 잃어버려 어둠 속에 빠지고 만다. 사람이 이런 지경까지 바뀌면 그야말로 사람됨과 세상살이가 뒤틀려 버린 것이다. 사람을 이보다 더 안타깝게 만드는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거짓말은 듣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을 먼저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무엇보다도 거짓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밖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찍혀서 따돌림을 받는다. 그것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불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이다. 그리고 안으로 스스로 지키려는 첫째 걸음 거짓말에 맛 들이면 어려움이나 괴로움을 떳떳하게 겪으며 견디고 이겨 내려는 마음이 자라지 못한다. 아픔과 슬픔을 참으면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어려움과 괴로움을 헤쳐 뚫고 나가려는 씩씩한 마음이 시들어지면서 가볍고 얄팍한 거짓말 한마디 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사람으로 주저앉는다.
마음 안에 꿋꿋한 뜻이 튼튼히 자라지 못하고 갈대처럼 나부끼는 느낌과 요모조모 저울질하는 생각에 매달려 값지고 보람찬 일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사람으로 머물고 만다. 작은 속임수가 주는 야릇한 기쁨의 둘째 걸음 거짓말에 맛 들이면 땀 흘리며 부대끼는 삶터에 뛰어들기가 싫어진다. 놀이가 주는 기쁨과 즐거움에 너무 빠져 일을 팽개치고 끝내는 노름에 홀려서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름꾼처럼, 얄팍한 속임수 거짓말에 길들여 지면 말 그대로 거짓말쟁이가 되어서 삶을 텅 빈 껍데기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셋째와 넷째 걸음의 거짓말, 곧 남을 이기고 짓밟으려 꾀하는 거짓말은 세상을 지키자는 법률이 가만두지 않는다. 남을 해치고 세상을 속이는 거짓말은 거기에 속은 남과 세상이 그냥 짓밟히며 넘어가지 않고 무서운 채찍으로 갚음을 안겨 주고야 만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 거짓말에 맛 들이면 머지않아 세상의 죄인이 되어 삶을 망쳐 버린다.
이래서 스스로 지키려고 비롯한 거짓말이 마침내 스스로 망가뜨리고 나아가 남과 세상까지 망가뜨리기에 이른다. 거짓말이 처음에 스스로 지키려는 본능에서 비롯하는 그것은 어쩌면 나쁘다고 싹을 잘라 버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잘라 버리려 해도 잘라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조물주가 슬기와 힘을 기르기에 앞서 얼마 동안만 스스로를 지키라고 넣어 놓은 방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스스로를 위해 남을 망가뜨리는 거짓말을 하는 정치인(그림 이무성 작가)
그러나 그런 첫걸음 거짓말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한 채 마냥 맛 들이고 길들이면 마음속에서 거짓말 버릇이 쉬지 않고 자라나 마침내 스스로와 세상을 망가뜨리는 데까지 이르고야 만다. 그래서 첫걸음 거짓말이나 늦어도 둘째 걸음 거짓말에서 그것을 올바로 다스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사람됨을 이루어 내는 길에서 가장 커다란 숙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저마다 풀어 가도록 맡겨 둘 일이 아니라 마땅히 어른들이 가르쳐서 풀어내도록 도와야 한다.
스스로 조그만 약점과 잘못을 거짓말로 숨기고 덮어서 넘어가는 짓은 어리석고 비겁하지만, 떳떳하게 드러내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은 훌륭하고 용감하다는 사실을 사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은, 우리 사회는 아직도 거짓말이 스스로와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인 줄을 제대로 모르고, 너나없이 버릇되어 나이 들고 어른이 되어도 밥 먹듯이 하면서 산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네 문화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힘써 온 우리네 국어 교육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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