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귀가 아프지 않고 늘 반가운 낱말 가운데 첫손 꼽힐 것이다. 그런데 일제 침략 뒤로 일본 한자 말 '감사하다'에 짓밟히고, 광복 뒤로 미국말 '땡큐'에 밀려서 안방을 빼앗기고 내쫓겨 요즘은 목숨마저 간당간당하다. 우리말을 아끼고 가꾸려는 뜻을 굳게 세우고 생각의 끈을 단단히 다잡는 사람이 아니면 입에서 '감사하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새로운 세상에 남보다 앞장서려는 사람들 입에서는 '땡큐' 소리까지 보란 듯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곰'에서 말미암았다. 단군 이야기에 단군을 낳으신 어머니로 나오는 '곰',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기도를 드리고 마침내 사람으로 탈바꿈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신 환웅의 아내가 되어 단군을 낳았다는 바로 그 '곰'이다. 이 곰은 본디 하늘 위에서 온갖 목숨을 세상으로 내려보내고 해와 달을 거느려 목숨을 살리고 다스리는 하늘 서낭(천신)과 맞잡이로, 땅 밑에서 온갖 목숨을 세상으로 밀어 올리고 비와 바람을 다스려 목숨을 살리고 북돋우는 땅 서낭(지신)의 이름이다.
이런 땅 서낭 '곰'을, 우리 글자가 없던 시절의 《삼국유사》에서는 '熊(곰 웅)'으로 적었지만, 우리말 그대로 한글로 적으면 '금'이었다. 그러니까 '곰'의 가운뎃소리 '고'는 본디 'ᅩ'와 'ᅡ'의 사이에 있는'.' 소리여서 듣기에 따라 '곰'으로도 들리고 '감'으로도 들리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가미(神)'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의 '금'을 '감'으로 들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다.
일찍이 우리 겨레는 누리 만물을 만들어 내시고 세상만사를 다스리시며 사람의 삶과 죽음을 이끄시는 분,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살갗 같은 몸으로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분을 남 달리 알아 모시고 살았다. 애초에 남녘에서는 그런 분이 땅 밑에 계신다고 믿었고, 북녘에서는 하늘 위에 계신다고 믿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늘 위에 계시던 분(천신)이 땅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되시고, 땅 밑에 계시던 분(지신)이 땅 위로 올라와 어머니가 되셔서 우리 겨레를 낳아 기르고 이끄신다는 믿음으로 바뀌어 널리 퍼졌다.
단군 이야기는 바로 그런 믿음이 빚어낸 수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누리 만물을 만들고, 세상만사를 다스리고, 사람의 삶과 죽음을 이끄시는 어머니가 '곰(금)'이었다. 세월이 흘러 한글이 만들어진 15세기 뒤로 오면 '고마'로도 썼는데, 이때에는 뜻이 '삼가 우러러볼 만한 것'쯤으로 낮추어졌고, '삼가 우러러본다'라는 뜻으로 '고마하다'라는 움직씨도 만들어 썼다.
▲ 스승에게 제자는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라고 한다.(그림 이무성 작가)
'고맙다'를 그대로 뿌리와 가지로 나누면 (곰+압다)가 되겠지만, 그것은 (곰+답다)에서 'ᄃ'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그러니까 '고맙다'는 본디 '당신은 나에게 목숨을 내주고 삶과 죽음까지 돌보며 이끄시는 곰(서낭)과 같은 분이다.' 하는 뜻이었다. 어찌 마음의 껍데기나 건네주는 '감사하다'나 '땡큐'와 견줄 것인가! 이처럼 깊고 그윽한 뜻을 담은 우리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보잘것없는 남의 말을 우러러보며 즐겨 쓴다는 것은 아무래도 올바른 문화인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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