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에는 유난히 숫자 4가 많이 등장한다. 1904년 4월 4일생이고 세상을 떠난 해는 1944년이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가 젊을 때 갇힌 감옥의 죄수 번호도 264번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의 본명이 이원록이지만 이육사가 그를 대신하는 필명(筆名)이 되었다. 25살 때인 1929년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요양을 위해 집안 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물면서 이영우에게 죽인다는 뜻의 육(戮)자를 골라서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곧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라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니, '戮'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陸'을 권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육사(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육(陸)이란 글자는 땅이란 뜻의 명사이지만 동사로 쓰일 때는 사람이나 재물을 강제로 빼앗고 죽인다(戮)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기왕이면 온건한 표현을 선택한 것이다.
▲ 이육사의 사진(이육사문학관)
육사는 1927년 가을 대구에서 일어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의 피의자로 몰렸다가 2년 7개월 만인 1929년 출옥한 뒤에 조선일보 대구지국을 맡아 운영하면서 기자로서 글도 쓰곤 했다. 1931년에는 독립운동자금 전달문제로 만주에 가서 있다가 1932년에는 북경으로 가서 10월에 김원봉이 교장인 조선군관학교에 입교한다. 말하자면 1931년 말부터 1932년 초에는 중국에 나가 있었고 귀국은 1933년 10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32년 1월 13일부터 『조선일보』에는 4차례에 걸쳐 이육사가 쓴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란 기사가 실렸다. 대구 약령시를 그 역사에서부터 현황, 미래를 처음으로 분석한 글이며, 이때 육사는 '肉瀉'라는 필명을 썼다. '고기 먹고 설사를 한다'라는 뜻이어서, 일본인들이 한국을 약탈해 배 불리다가 설사나 하라는 뜻을 담아 항의를 한 것이었다. 육사(陸史)라는 호를 정식으로 쓴 것은 이 뒤로 알려져 있다.
이육사, 그는 청포도 등 많은 뛰어난 시를 지은 시인이기에 우리 문학사에 시인으로 우뚝 솟아있지만, 동시에 평생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로서도 찬연히 빛난다. 흔히 문인들은 '문약(文弱)하다'라는 표현대로 글은 잘하지만 행동은 하지 않는 편인데 이육사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행동파였다.
"남경에 있는 군사학교(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가셨어요. 아버지가 윤세주 선생을 특히 존경하셨는데 그분을 알게 되면서 김원봉과 이야기가 됐고 군사학교 1기생으로 가시게 된 거죠. 아버지는 훈련 같은 걸 아주 잘하셨대요. 아버지 친구분이 말씀하시길, '너희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였다. 특히 권총을 잘 다뤄서 말을 타면서도 (쏘면) 백발백중 명중하는 명사수였다'고 하셔요." 1941년 생으로 올해 83살을 맞은 육사의 딸 옥비 씨의 회고담 그대로 육사는 창백한 문인이 아닌 열혈 투사였다.
그가 태어난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이육사문학관이 서 있다. 문학관에는 생전 육사와 그 주변 인물들의 독립운동과 문학활동을 알리는 자료와 유물,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육사의 형제들, 그들 모두 시대를 넘는 지사로서의 삶을 추구했던 것을 함께 볼 수 있다. 육사의 친필 원고도 남아있다. 강인한 필치는 그가 평생 추구한 우국작가로서의 진정한 문인이자 선비로서의 기개를 엿보게 해준다.
▲ 이육사의 편지 (육사문학관)
▲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 전경
2024년 올해는 육사가 태어난 지 120돌, 순국하신 지 80돌이 되는 해다. 1944년 1월 16일에 베이징의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하기까지 40년의 짧은 생애 동안 17번이나 옥살이를 한 이육사는 올해 광복절을 맞아 국가보훈부에 의해 자기의 시 ‘청포도’의 구절처럼 쪽빛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복원됐다. 국가보훈부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 87명에게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복원해 광복절에 공개함으로써 새로운 영웅의 모습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이육사도 그중에 포함되었다.
▲ 형무소의 이육사(왼쪽)와 새로 복원된 이육사(오른쪽)
순국 80돌을 맞아 이육사가 순국한 베이징의 옛 감옥 입구 골목에서는 올해 1월 13일, 뜻있는 우리 국민이 육사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서울과 대구 등 우리나라 전역에서도 크고 작은 추모행사가 올해 줄을 잇고 있다. 이런 가운데 때마침 필자는 지난달 말 이 육사문학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전시장을 꼼꼼히 돌아보며 그의 생각과 고단한 삶을 돌아보고 나서다 1층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다.
이옥비 여사였다. 곧 이육사의 따님이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진성 이 씨로서 필자에게는 먼 누님뻘이 된다. 인사를 하고 사진을 같이 할 기회를 얻었다. 올해 83살이지만 단아한 몸매와 매서운 눈매가 사진에서 보는 아버지를 많이 빼닮았다. 건강이 여전하시다고 한다. 따님은 현대인들도 놀랄 옥비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고 했다.
▲ 이옥비 여사와 필자
"'옥비'라는 이름이 당시치곤 예쁘잖아요. 남들이 왜 이렇게 이름이 예쁘냐고 물어보면 '조상을 잘 뒀다'라고 웃어넘겨요. 사실 이 이름도 내가 태어나고 100일 만에 아버지가 지어주신 건데 당시 집안 어른들이 딸 이름 이렇게 저렇게 지으라면서 조언을 많이 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왜 너희들이 내 딸 이름을 짓냐?'라면서 당신이 직접 '옥비'라고 지으셨죠. 기름질 옥(沃) 아닐 비(非), 결국 기름지지 않다는 뜻인데 아버지가 의미를 덧붙여주시길 '욕심 없이 남에게 배려하는 간디 같은 사람이 돼라' 하면서 이름을 주셨다고 해요."
이육사문학관은 육사 탄생 120돌ㆍ순국 80돌을 기려 11월 이달 5일부터 경북 예천의 도청대로에 있는 경북도서관 기획전시실에서 '이육사 전(展)'을 29일까지 열고 있다. 전시 1부는 육사의 일상을 돌아보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엽서와 편지, 육필 작품을 선보인다. 주요 전시 작품은 박쥐를 통해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편복', 이육사 사후 발견된 원고 '바다의 마음', 이육사의 난초그림 '의의가패' 등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한문편지와 엽서도 전시된다.
2부는 이육사문학관에서 소장 중인 김기림ㆍ김소월ㆍ김수영ㆍ박목월ㆍ윤동주ㆍ정지용ㆍ천상병 등 현대 유명 작고 문인 육필이 선보인다. 일제시대를 고뇌 속에 산 우리 문인들이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을 그들의 문인의 육필 원고를 통해 엿볼 수 있다.
▲ 이육사가 신석초에게 쓴 엽서(이육사문학관)
육사의 따님 옥비 씨는 고난 속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광야를 달려가 싸우다 숨진 문인 이육사 삶의 생생한 증인이기에 앞으로도 더욱 길게 증인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
옥비 씨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1943년 새해가 되자 절친한 친구인 신석초와 함께 홍릉수목원을 함께 걸으며 가까운 날에 북경에 가려고 한다고 말하고는 국내로 무기를 들여오려는 계획에 따라 중국으로 갔다가 7월 모친 장례식에 맞춰 잠시 국내 들어왔는데, 이때 동대문 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검거돼 8월에 베이징으로 이송되었다. 이송될 때 옥비 씨는 만 3살이었고 눈과 입만 구멍이 뚫린 밀집 용수를 뒤집어쓴 아버지로부터 "아버지 다녀오마"라는 말을 들은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회상한다.
▲ 베이징의 일본군 형무소
▲ 이육사 부고(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의 상임이사로서 문학관을 찾아오는 방문객과 참배객들에게 아버지의 일생을 전해주는 이옥비 여사는 조용히 말한다. "나이 80이 넘은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 이름의 의미, 그게 바로 아버지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해요. 가끔 내 이름이 (한자가) 안 좋다고 바꾸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건 이 이름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절대 바꿀 수 없다, 그랬죠." 이버지의 고단하지만 굽히지 않은 삶은 그의 시 속에 남아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절정', 이육사
▲ 이육사의 시집(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에 오면 책에서 들은 청포도 시의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암울한 시기 나라를 독립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건 강인한 선비를 만나게 된다. 100년이 되어도 꺼질 줄 모르는 기개 앞에서 우리들은 이기주의에 빠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를 위한 진정한 삶을 다짐하는 결심을 고쳐서 하게 된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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