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조선인이 위험한 구로3댐에서 일하게 되었나?
1910년 한일강제합방 이후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조선인의 90%인 농민은, 소작농이거나 토지가 있어도 소작농과 다름없는 사람이 77%가 되었다. 여기에 1920년대 ‘산미증산계획 사업’으로 생산되는 쌀의 60%(891만 석)를 일본에 수탈당해서(노형석 《한국근대사의 풍경》, 266쪽) 1인당 미곡 소비량이 1912~1916년 평균 0.7188석이었던 것이 1932~1936에는 평균 0.4017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채호기 《일제식민지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297쪽)
이렇게 쌀을 수탈당하고 완전히 몰락한 농민은 농촌을 떠나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찾아 유랑하다가 임금이 높다는 일본의 구로베(黒部)로 모여들었다.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의 전시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정책 때문에 구로3 터널의 ‘고열’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렸다. 돈 때문이라고는 해도 목숨을 걸고 고열 속에서 가장 위험한 일을 했던 노동자의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
구로3댐 공사에(1936~1940), 조선인이 처음에는 이렇게 돈 벌기 위해 자유 도항해서 왔지만 1939년부터는 ‘모집’이라는 형태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혼재했다. 이는 일본이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공포하고 1939년 이후에는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에 따라 9월부터 조선에서도 강제동원했기 때문이다.(정혜경, 《강제동원&평화총서21 팩트로 보는 일제말기 강제동원2》, 18쪽) 이렇게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급여나 구속면에 있어서 이전에 일본에 자유롭게 갔던 도항자의 노동조건과 달랐다.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급여 등 노동조건이 완전히 달랐다.
(2) 조선인 노동자 수
구로베 공사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공식 절차 없이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정확한 인원수는 알 수 없고, 각종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조선인 노동자 수를 유추해 보려고 한다.
먼저 박경식이 일본 내무성 자료에 근거해서 작성한 1936~1940년(구로3댐 공사기간)의 도아먀현 거주 조선인과 그 가운데 토목일 하는 사람의 수를 정리해보았다.(《재일조선인 관계자료집성》, 2~4권)
▲ 1936~1940년(구로3댐 공사기간)의 도아먀현 거주 조선인과 그 가운데 토목일 하는 사람의 수
그런데 <기타니혼(北日本) 신문>에서는 1940년 도야마현 거주 조선인을 7,150명이라고 하는 등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무라카미 효에는 《구로베강》에서 구로베 오쿠야마(奥山) 국유림의 현장 식당 공사 관계자 3,500명 가운데 1/3이 조선인이라고 했고, <호쿠리쿠타임스 1938.6.27.>는 “약 1,000명의 반도인 토목공이 공사에 종사”라고 해서 1,000명 정도일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인 사회대중당의 가입 선언 결의문>에서는 “구로베강 상류 발전공사의 2,000명의 우리 토목건축 노동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요모기 사쿠지로는 “당시 센닝다니(仙人谷)에는 800여명의 인부가 있었고 사무직 책임자 말고는 전부 조선인이었다.”라고 했고, 다른 사료에서는 ‘센닝다니의 각 현장 식당 수용인원은 935명이고 센닝다니에서만 1,000명 정도’(《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57쪽, 재인용)라고 했다. 그렇다면 센닝다니 고열터널 반대편에서 공사했던 아조하라도 비슷한 규모라고 본다면 고열터널에 종사한 노동자는 2,000명 정도다.
▲ <아조하라다니에서 센닝다니에 이르는 고열지대>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55쪽)에서 노동 통계조사에 따라 구로3 건설에 종사한 노동자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38년 이전의 사료는 없지만, 1939년에는 3,455명 가운데 (아조하라 2,300명) 기술자가 88명, 1940년에는 2,300명 가운데 (아조하라 1,600명) 기술자가 84명이라고 밝힌 것을 보면 센닝다니의 건너편 아조하라에도 1,000~2,000명의 노동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호리에 세츠코는 1940년 국세(國勢)조사에서 구로3댐의 노동자가 전체 3,545명이므로 그 1/3인 1,200명 정도가 조선인일 것으로 추정한다. (호리에 세츠코, 《구로3댐과 조선인 노동자》, 桂書房, 2023. 57쪽)
이렇게 자료마다 노동자 수가 다르고 더구나 그 안의 조선인 수를 알기 어려운 것은, 당시 등록하지 않고 일했던 노동자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기록을 중요시하고 좋아하는 일본이 철저하게 기록을 없애나간 것에 더 큰 무게가 실린다. 그리고 “그 작열하는 터널 속에서 목숨 걸고 굴을 팠던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일본에 일하러 온 조선인들이었다.”라는 증언이 있다.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24쪽)
구로3댐 공사에 조선인이 적어도 1,200명 정도 종사했는데 그 가운데 고열터널 등 가장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던 것은 증언으로 보아 사실이다. 당시의 일본의 기술자, 노동자들은 “조선인 노동자가 없었다면 <구로3> 댐은 완성하지 못했을 것”, “고열터널사무직 책임자 말고는 전부 조선인이었다.”라는 증언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1939년, 1940년에 모집이라는 형태로 강제동원되어 온 조선인은 이런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기 싫어도 해야만 했고 급여도 적고 감시 속에서 거친 대우를 받았다.
(3) 조선인들의 노동조건
노동자의 일당은 남성 2엔 5전. 죽, 삶은 달걀, 우유를 주고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면 칼슘 주사를 놔주기도 했다. “굉장히 힘든 일이었을 텐데, 그동안 더 힘든 곳을 옮겨 다녔던 건지 도망치는 사람도 없이 즐겁게 일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열터널에서의 작업은 조선인이었기에 가능했다.”라며 지역 사람들은 조선인의 뛰어난 체력과 수준 높은 터널 기술에 감탄했다는데 그들은 항상 죽음과 마주하는 상황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뒤집어서 본다면 “목숨을 걸어야 했기에 아무리 높은 임금이라도 일본인은 터널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죽, 달걀, 우유, 파격적인 임금이라는 좋은 조건을 갖췄더라도 조선인이 없었다면 공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84~85쪽)
이와 같이 공사 자체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시도 삼엄했다. 백재명씨의 증언에 따르면 항상 경찰한테 감시당했다고 한다. 우나즈키 온천과 게야키다이라(欅平)에 파출소가 있어서 “오봉(추석) 때 내려오면 경찰이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얻어맞으면서 소지품을 빼앗긴 사람도 있었다.”라고 한다. 현장 식당 감독들도 파출소와 협력하여 노동자들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고노가와 준코는 “구로베에서 학대가 없었다”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지만, 구로베의 가혹한 노동 자체가 학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댐 속에 그들이 파묻혀 있다”라는 소문도 전국적으로 퍼져있고 “그들은 벌레 취급을 받았다”라는 증언도 있다고 밝혔다.
물론 인간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다들 그날그날 힘들게 살아가는 게 고작이에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묻지도 않았습니다. 다들 똑같은 고민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대화를 나눠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거죠.”라는 데서 망국 유랑민의 심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앞의 책, 66쪽, 110쪽, 113~114쪽)
▲ <고열지대 터널 공사. 2019 구로베댐 50주년 기념특별 부스, 黒部川第三発電所建設記録(관서전력 <구로베를 열다>) 유튜브 갈무리
구로3 터널 공사를 다룬 기록소설 《고열터널》에서는 잔여 다이너마이트의 폭파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주인공이 인부들에게 폭파 뒤 2시간 지나면 위험하지 않다고 설득하자, 공사 책임자 네즈(根津)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느긋한 소리하고 있네. 관통이 코앞인데.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공사를 진행시킬 거야!”(204쪽) 이것이 ‘인부’로 묘사되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공사 책임자의 인식이다.
공사 초기에 자유 도항해서 온 조선인은 구로베의 공사가 위험하지만 일당이 높은 편이고 간식도 먹을 수 있는 조건을 보고 자율적으로 왔다. 그런데 1939년 이후 모집이라는 형태로 강제동원돼 오게 된 조선인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급여 등 노동조건이 완전히 달랐다는 증언이 있다. 뜨거운 고열터널 안에서 작업해야 하는 고통, 잔여 다이너마이트의 폭발과 괴력의 눈사태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일본인들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안 하겠다는 구로3 공사를 조선인들은 떠밀려서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사 지휘관은 공사 실적을 위해서 인명사고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4)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의 50~70%(박경식<조선인 강제연행 기록>)고 여기에 고용주나 인부 감독에게 30~40% 중간착취 당해서 생활 수준이 최하위였다.
구로3의 경우에는 도야마현의 다른 조선인 일용직 노동자에 견줘 상당히 조건이 양호했다. 호쿠리쿠타임스(1938.1.15.)에는 “약 700명의 인부는 노동시간이 극히 짧고 식비는 회사 부담으로 하루 임금 2엔 50전. 한 달에 75엔 벌 수 있음. 하산하는 사람 한 명 없이 공사는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노가와 준코는 사할린의 토목공 일당이 4엔이었으니까 구로베의 2엔 50전이 특별히 높았다고도 할 수 없지만 식사가 나와서 저금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건이 좋은 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구로베 저편의 목소리》, 63쪽)
NHK의 <구로베를 열다>에서는 급여를 높게 책정했지만, 너무 위험해서 노동자들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일당을 두세 배로 올려 겨우 추진했다고 한다. 결국 조선인 노동자들이 자유 도항해서 구로베까지 일당을 보고 흘러들어 왔지만, 그것은 목숨을 건 작업이었기 때문에 일당이 높은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좀처럼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이 그런 임금으로 고위험 일자리에 가야 했다.
그런데, 함바집 아들 박경호씨가 1940년 조선에서 ‘모집’해서 데려온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당히 낮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모집’이라는 표현은 자발적인 것 같지만 일본의 국가 정책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모집 광고 때의 노동조건과 다른 사기였고, 감시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이라고 할 수 없는 강제노역이다. 따라서 초기에 ‘자유 도항’해서 온 노동자와 1939년부터 ‘모집’으로 강제동원되어 오게 된 노동자의 임금은 큰 차이가 있었고 자유롭게 도시로 나갈 수도 없었다고 한다.
구로3댐에서 일한 조선인들은 나라를 빼앗겨 먹고살기 위해 구로베까지 스스로 흘러들어왔거나 1939년 이후 강제동원돼 들어 왔다. 침략전쟁을 위해 일본이 만들려고 했던 구로3 수력발전소는 암반 온도 180~200도 이상으로 인간이, 생명체가 들어갈 수 없는 극한의 고열터널이 있는데 끝내 공사를 완수했다. 죽음과 직면해야 하는 그런 곳에서 일본인이 일하려 하지 않는 것을 조선인들이 대신해서 뼈와 살을 갈아 넣는 고통 속에서 일해야 했다.
다음 회차에서는 구로3댐 고열터널에서 조선인들의 온몸이 찢겨 흩어지게 했던 사고들에 대해 알아보겠다.
[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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