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파 병원에 온 사람을 의사가 진료한다고 해서 감동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의사는 환자를 보고 월급을 받으니,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학생이 숙제를 하거나 택시기사가 승객을 안전하게 모시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들은 그 자체로 감동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이 당연한 일을 제대로 못했을 때 처벌이 따르기도 한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감동을 주고 있는 모양이다. 발단은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을 제쳐두고 무슨 정치개혁을 한다고 할 수가 있겠나?” “일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 잃어버린 시간, 인생을 누가 보상할 수 있겠나?” 얼핏 보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올인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 같지만, 놀랍게도 이건 국회한테 한 말이었다.
물론 국회가 일을 잘한다고 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대통령과 비교하면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은 데다, 국회가 이렇게 된 건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다. 유승민 원내대표를 찍어낸 것에서 보듯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쫓아내 버리는데, 국회가 소신껏 일할 수나 있을까? 대통령이 통과시키라고 강조한 소위 노동개혁 법안이 비정규직 허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파견근로자가 허용되는 업종을 확대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젊은이들이 별반 좋아할 것 같지 않지만, 대통령이 간만에 민생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국회선진화법이었다. 3년 전 국회를 통과한 국회선진화법은 법안 통과에 의석 과반이 아니라 60%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기준을 강화한 법안이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얻지 못할 경우 야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만들었는데, 그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결정한 건 당시 비대위원장이던 박 대통령이었다. 현재 새누리당 의석수는 157석으로 53.4%에 불과하니, 대통령이 국회, 특히 야당을 욕하고 있는 것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국회의장이 직권으로 법안을 본회의에 상정해 처리하는 ‘직권상정’이란 게 있었던 것. 대통령의 명이 떨어지자 삼권분립 같은 건 예전에 갖다버린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장실로 달려가 정의화 의장을 협박한다. 여야 합의가 안되고 있는 노동개혁 법안과 경제살리기 법안을 직권상정해달라고 말이다. 새누리당 입장에선 의장이 자기 당 출신인 만큼 설마 거절하랴 싶었을 테지만, 정 의장은 뜻밖의 말을 한다. “직권상정은 국가비상사태에나 가능하다고 국회법에 돼 있는데, 지금 경제상황을 그렇게 볼 수 있겠느냐?” 그는 자신에 대한 비난에 불쾌한 감정도 드러냈다. “국회선진화법에 찬성해 놓고 (그 법에 반대했던)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이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야당을 설득하라.”
‘국회를 대표하고 의사를 정리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사무를 감독하는 기관.’ 국회의장의 사전적 정의다. 그렇다면 청와대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국회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국회의장이 해야 할 당연한 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의장의 행동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간 우리 사회 요직에 있던 분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환경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환경부는 4대강을 반대하기는커녕 대대적인 홍보 활동에 나섰고,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은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댓글을 달았다. 군통수권을 가진 대통령은 당연히 해야 할 전시작전권 환수를 무기한 연기했다. 검찰은 대통령에게 누가 되는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일본 기자를 무리하게 기소했다 망신을 당했다. 해경은 배가 침몰하자 아이들 대신 선장과 선원들만 구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IMF 사태’를 거론하며 경제위기가 다시 올 수 있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에 경제부처 장관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경제가 말 몇 마디로 요동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건 명백한 직무유기다. 이런 와중에 국회의장이 대통령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정 의장의 앞날이 그리 평탄할 것 같지는 않다. 애국단체들은 벌써부터 정 의장 규탄 집회를 열고 있고, 새누리당 의원들도 ‘국회의장 해임건의안’을 제기하는 중이다. 더 두려운 분은 바로 박 대통령으로, 역대 대통령 중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찍어내기’와 ‘뒤끝 작렬’ 부문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위 자리에 올라 있어서다. 국정원 댓글사건을 열심히 수사한다는 이유로 검찰총장을 찍어낼 때는 ‘혼외자식 의혹’이란 방법을 썼고, 여당 원내대표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유승민을 찍어낼 때는 그를 배신자로 몰면서 다음 선거에서 떨어뜨려 달라고 윽박질렀는데,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쓸지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정의화, 그가 어떻게 되든 그의 이름은 기억해 놓자. 어쩌면 그가 이 정부에서 ‘해야 마땅한 일을 한 마지막 인물’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지난 게시판 > 서민(단국대 의대교수)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리형 정치인이 보고 싶다 (0) | 2016.02.29 |
---|---|
제목만 읽는 대통령 (0) | 2016.01.13 |
청년들, 연대가 필요하다 (0) | 2016.01.13 |
칼럼니스트가 두려워하는 대통령 (0) | 2016.01.13 |
대한민국, 보수 대통령의 천국 (0) | 2015.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