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113 – 길처

튼씩이 2019. 8. 5. 08:09

길은 끔찍하다. 모든 길은 부재(不在),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길은 존재가 새어 나가는 구멍이다. 길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천년만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눈물 흘리며 길 위를 떠다니는 불안한 존재들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심마니들은 길을 사시미라고 불렀던 것일까.


길은 왜 길인가. 심하게 술 취한 날 길길이 뛰어오르던 길, 그래서 길인가. 길어서 길인가. 경부고속도로가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듯 길은 언제나 어떤 곳과 또 다른 어떤 곳을 이어준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길은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는가. 과거와 미래, 다시 말해 역사인가. 사람은 없음(無)에서 태어나 죽음으로써 다시 없음(無)으로 돌아간다. 결국 인생길은 없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통로인데, 그 길은 없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지름길인가, 아니면 에움길인가. 에움길이라면 없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너무나 뻔한 길을 에둘러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움길은 우회로(迂廻路)인데 엔길, 돌길, 돌림길, 두름길과 뜻이 비슷한 말이다.


질러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길에 붙은 이름이 많은 것처럼, 그리고 인생길이 그런 것처럼 말모이(사전)에 실려 있는 길들의 이름을 훑어보면 큰길이나 한길같이 넓고 걷기 쉬운 길보다는 좁고 지나기 어려운 길들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뒤안길이라는 말이 있다. 한길이 아닌 뒷골목의 길을 뜻하는데, 햇볕을 못 보는 초라하고 음침한 생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행가에 많이 나오는 인생의 뒤안길이다. 뒤안길과 비슷한 말로는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뜻하는 고샅, 이면도로(裏面道路)를 가리키는 속길이 있는데, 골목으로 접어드는 어귀의 길가는 병문(屛門)이라고 한다. 길섶, 길녘은 길가와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길처 (명) 가는 길의 근처.


쓰임의 예 – 수곡리는 어디 다른 데로 가는 길처도 아니고 뒤에 산을 지고 있는 막바지 동네였으므로….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고샅 – 마을의 좁은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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