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124 – 궂은비

튼씩이 2019. 8. 19. 08:17

몇 해 전 그룹 자우림이 소속사 전속계약 기간이 만료돼 독립하기로 하고 자기들끼리 둥지를 만들었는데 이름이 범상치 않았다. ‘러브공작단’, 한자로는 ‘裸婦工作團’이라고 쓴다. 과연 자우림답다고 생각했다. 자우림은 ‘자줏빛(紫) 비(雨)가 내리는 숲(林)’이라는 뜻이다. 자우림의 자우(紫雨)는 자우림이라는 환상의 공간에 내리는 비지만, 또 다른 자우도 있다. 식물이 자라기 알맞게 내리는 비를 한자말로 자우(滋雨/慈雨)라고 한다. 혜택을 주는 비라 해서 혜우(惠雨)나 택우(澤雨), 상서로운 비라 해서 서우(瑞雨), 농작물을 기름지게 한다고 해서 고우(膏雨)라고도 한다. 오래 가물다가 내리는 단비도 자우라고 하는데, 희우(喜雨)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호우(好雨)나 영우(靈雨)는 때를 맞춰 알맞게 오는 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비들이 좋은 비라면, 물론 나쁜 비도 있다. 매우(霾雨)는 흙이 날리는 비바람이고, 쓸 고(苦) 자를 쓰는 고우(苦雨)나 음우(陰雨)는 궂은비를 뜻한다. 괴우(怪雨)는 글자 그대로 괴상한 비인데, 회오리바람 같은 이동성 저기압이 호수, 늪, 바다 같은 곳에 나타날 때 공중으로 휩쓸려 올라간 흙이나 벌레, 물고기 따위가 다른 지역에서 빗물에 섞여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도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노인인 ‘나카타 상’이 괴우를 내리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호우주의보’의 호우(豪雨)는 큰비, 취우(驟雨)는 소나기, 맹우(猛雨)나 능우(凌雨), 질우(疾雨)는 몹시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가리킨다. 『취우』는 6.25를 배경으로 한 염상섭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는 비는 뇌우(雷雨), 장맛비는 음우(霪雨)라고 한다. 세우(細雨)는 가랑비, 미우(微雨)는 보슬비를 가리킨다. 소우(小雨)나 과우(寡雨)는 잠시 동안 조금 내리는 비, 성길 소(疏) 자를 쓰는 소우(疏雨)는 뚝뚝 성기게 내리는 비의 이름이다.



궂은비 (명) 끄느름하게 오랫동안 내리는 비.


쓰임의 예 –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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