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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가 물질할 때 입던 소중기, 고무옷에 밀려나

튼씩이 2015. 11. 6. 14:47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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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2015). 10.30.



“제주의 잠녀는 일본의 해녀보다 추위에 강하다. 또 임신이나 월경 중이라도 꺼리지 않고 사철 작업을 한다. 잠수를 할 때는 ‘소중기’하고 부르는 남색 무명의 수영복을 입는다. 앞쪽은 젖가슴까지 덮지만, 뒤쪽은 등이 다 드러나고 가느다란 옷감이 열십자로 아래쪽에 붙어 있다.” 이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제주에 머물며 제주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이즈미 세이이치 씨가 쓴 《제주도(濟州島)》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따르면 해녀들은 ‘소중기’를 입고 물질을 했습니다. 소중기는 소중이, 수견, 도곰수견, 물옷이란 말로도 부르지요.

‘소중기’는 제주말로 속옷을 뜻하는 것으로 원래 집에서 짠 무명으로 만들었는데 차츰 직물공장에서 만든 광목을 썼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소중기’ 하면 흰옷을 떠올리지만 제주 특산물인 감으로 물들인 갈옷을 선호하는 제주답게 갈옷 소중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는 미역을 짊어져도 때가 덜 타고 생리중이어도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소중기는 넉자 가량(가로 25cm, 세로 200cm)의 무명옷감으로 짓는데 조각보 방식으로 한 번에 접어 만든다고 하지요. 다만 가슴 부분은 다른 옷감으로 덧대기 때문에 두 겹이 되어 자연스레 젖가슴을 보호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소중기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해녀들은 이제 바다 속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고무옷을 입고 물질을 합니다. 그 덕분에 오랜 시간 물질을 할 수 있어서 그만큼 소득이 늘어났습니다. 다만, 고무옷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서 무거운 납덩이를 매달고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고, 바다 물이 더워질 때는 고무옷을 입은 탓에 살이 짓무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답니다. 편리함과 늘어난 소득 대신 또 다른 구속을 감내해야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노름꾼이 소중기를 입고 노름을 하면 돈을 딴다.”라는 믿음이 있어 빨아서 말리려고 돌담에 걸쳐두면 종종 도둑맞기도 한다는 해녀 속옷, 소중기는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습니다.

옛 얼레빗 (2011-10-27)


2189. 장원급제를 버린 올곧은 선비 매천 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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亂離袞到白頭年 백발이 성한 나이에 난리 속을 만나니
幾合損生却未然 이 목숨 끊을까 하였지만 그리하지 못하였네
今日眞成無可奈 오늘에는 더 이상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 바람에 날리는 촛불만이 푸른 하늘에 비치도다.

위 시는 조선 후기 우국지사 매천 황현(1855 ~ 1910)이 목숨을 끊기에 앞서 지은 시 4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매천은 일제에 나라가 짓밟히는 꼴을 보고 여러 차례 목숨을 끊으려 하다가 한일강제병합이 되자 목숨을 끊는 시(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하였습니다. 그는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때부터 1910년(순종 4)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때까지 47년 동안을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생생히 기록해두었지요.

매천은 28살 때 과거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까닭으로 2등으로 떠밀리자 벼슬길을 버렸습니다. 5년 뒤 아버지의 권유로 생원시에 응시해 역시 장원으로 합격했지만 어지러운 시국과 썩은 관리들을 보고 관직에 나갈 마음을 접고 전남 구례에 내려가 제자 기르기에 온 정성을 쏟게 됩니다.

매천이 태어난 곳은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로 이곳에는 매천생가가 있으며, 근처에는 매천역사공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 매천이 죽음을 맞은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에는 매천 선생을 기리는 사당 “매천사(전남 문화재자료 제37호)”가 있으며, 구례군 구례읍 봉북리에는 매천을 기리는 “매천도서관”을 세워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로 하여금 나라정신을 새기게 하고 있습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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