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우표이야기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튼씩이 2020. 9. 25. 21:47

 

3·1운동의 상징이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혼의 표상 유관순 열사는 조국의 독립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에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정사업본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괄괄한 성격에 성경 구절을 한 번 들으면 줄줄 외울 만큼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사상을 깨우치고 기독교 바탕의 신문화를 배우면서 민족정신을 키워갔습니다. 유관순이 8살이었던 1910년, 우리 민족은 치욕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성 교육의 필요성에 강한 확신과 의욕을 가지고 있던 사애리시부인이 영민한 유관순을 주목하였고, 1915년에 유관순은 교비생으로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의 전신)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며 나라 사랑의 정신을 더욱 굳게 다졌습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광무황제)의 서거로 온 국민이 슬픔에 빠졌고, 민족대표 33인은 이 사건을 독립운동 절호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마침내 3월 1일, 전국에서 몰려온 애도행렬 앞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발표로 3·1운동은 시작되었고, 2천만 민중의 한목소리는 우리 동포가 있는 곳이라면 국내외 어디서든 울려 퍼졌습니다. 이화학당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유관순 역시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함께 ‘5인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간 유관순은 1919년 4월 1일에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되었습니다. 수감 중에도 옥중 동료들을 격려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은 그때마다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결국 이듬해 9월 28일에 서대문 형무소 감방에서 순국했습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 태극기를 손에 쥐고 맨몸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맞섰던 유관순 열사의 생애는 순국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동을 전합니다. 기념우표에는 어린 나이에 만세운동을 이끌다 일본 헌병에게 잡힌 후 그들에게 직접 일갈한 유관순 열사의 한마디가 쓰여 있습니다. 굴하지 않는 용기를 남기고 떠난 유관순 열사를 이번 우표와 함께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