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 한국 사람 다 됐네요.” 최근 방송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한류를 타고 외국인이 출현하는 프로그램이 늘었는데, 외국인이 매운 음식을 두려움 없이 잘 먹거나 한국어 관용구를 감칠맛 나게 쓰면, 곁에 선 한국인이 칭찬처럼 이렇게 말한다. 감탄하는 마음에서 나온 선한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이 과연 들을 사람 처지에서도 긍정적일까? 사실 비교군이 될 ‘한국 사람’의 특징도 규정하기 어려우므로, ‘한국 사람이 다 된 것’도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국 사람에게 ‘한국 사람 같다.’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한국인이 사는 방식을 객관적으로 보여 준 문화 비교 연구가 있다. 호프스테더[Hofstede(1981, 1991)]는 53개국의 문화를 개인주의 지수, 권력 차이 지수, 불확실성 지수, 남성성 지수로 비교하여 한국 문화의 특성을 상대적으로 정리했다. 한국은 집단적 문화권, 위계질서를 지키는 문화권, 불확실성을 회피하고 안전성과 겸손함을 요구하는 문화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특성이 한국 사람의 표현 방식에 어떻게 녹아 있을지 좀 더 찾아보자.
한국어에서 ‘우리’라는 말은 고빈도어다. ‘내 것’을 ‘우리 것’으로 표현하는 언어가 많지 않은데, 한국어에는 ‘우리 마누라’도 있다.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구호로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때의 ‘우리’란 ‘남’과 구별되는 이중적 의미로 쓰이지만, 이 외침이 집단주의의 증거인 것은 분명하다. 이때 집단은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해 권위를 부여한다. 집단주의와 권위주의 문화권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말할 때는 비교적 제약이 없다. 그리하여 ‘어디에 사느냐’, ‘왜 거기서 사느냐’, ‘결혼은 했느냐’, ‘어쩌다 아직 안 했느냐’ 등의 질문도 관심에서 나온 것으로 정당화된다. 안정성과 겸손함을 지향하는 문화에서 아랫사람은 그런 질문 앞에서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하는 편이다.
문득 고슴도치의 거리가 떠오른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가시 탓에 고슴도치는 동족과 가까이 붙지 못한다. 서로 찔리지 않으면서 온기를 나눌 적절한 거리, 이를 ‘고슴도치의 거리’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배웠다. 집단주의와 권위주의에다가 안정성을 지향하는 문화에서 자란 한국인에게 적절한 거리 두기란 애초 희박한 개념이다. 그런데 2020년, 한국 사회에 큰 변화가 닥쳤다. ‘사회적 거리, 자가 격리’라는 말이 긍정적 가치를 담아 등장한 것이다. 격리란 전염병 환자나 면역성이 없는 환자를 다른 곳으로 떼어 놓는 것으로, 사실 어쩔 수 없을 때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익숙할뿐더러 유치원생도 다 아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두는 거리’가 남에 대한 배려를 함의한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거리 두기’에서 배운 긍정 의미를 준거로, 그간 한국어에서 친절과 관심으로 미화된 표현을 돌아보자.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이에게 ‘결혼은 언제 하니?’, ‘그래, 취직 준비는 잘 되어 가?’, ‘살 좀 쪘네.’라고 하는 것이 과연 가까운 사이라서 할 수 있는 인사말인가? 선한 의도로 자신을 개방하고 타인에게 관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 가까이 다가선 가해자 고슴도치가 되어 있다.
그러면 ‘너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숙제가 남는다. 언어예절이란 친밀과 평등의 정도에 따라 격식성과 화제거리를 조율하며 다가가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 정치, 종교, 사생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자신을 노출하는 정도도 인간관계에 따라 달라야 한다. 자아 노출(Self-disclosure) 이론에서는 인간관계에 따라 자신을 적절히 노출하는 것이 곧 인간관계를 지키는 일임을 강조한다. 화제거리가 사실 정보, 기호, 의견, 신념 순으로 갈수록 자아를 노출할 위험성이 높아진다.
‘휴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치자. ‘우리 회사에서 휴가를 며칠 쓸 수 있어?’는 회사에 대한 정보를 묻는 것이지만, ‘이번 휴가에 뭐 해?’는 개인 정보에 대한 질문이다. ‘자고로 휴가란 대자연에서 보내야지.’, ‘휴가를 집에서 빈둥거리며 보낼 수는 없지.’와 같은 말은 자신의 기호와 의견, 신념까지 노출하는 말이다. 이쯤에서 ‘한국 사람 다 되었다.’를 다시 보면, 그것은 한국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자신의 기호와 신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말이다. 자아 노출 이론에서는 상대가 노출하는 정도에 맞추어 자신을 보여 주라고 조언한다. 인간관계에 맞지 않게 자신의 마음을 많이 보이면 상대방은 오히려 한 걸음 물러날지도 모른다.
달변가들은 이 세상에 말하기는 두 가지뿐이라고 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말하기와, 상대가 듣고 싶은 데까지만 하는 말하기가 그것이다. 말을 과하게 해서 일을 그르쳤다는 속담은 무지 많다. 오늘은 자기만족에서 한 걸음 물러서, ‘거리 두고 말하기’를 연습해 보자. 배려와 관심 사이에서 최적의 거리는 얼마만큼인가? 그 답은 고슴도치가 하는 것처럼 상대방과 조금씩 다가서면서 함께 찾아가는 데 있을 것이다.
글: 이미향(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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