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주’와 ‘치즈’의 만남
- 언더우드의 『한영ᄌᆞ뎐』(1890)에 나타난 한국어와 영어의 대응 관계 -
간장, 된장, 고추장의 원료가 되는 메주는 한국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식재료이다. 한편, 우유를 발효해서 만드는 치즈는 서양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식재료이다. 그런데 ‘메주’와 ‘치즈’가 만났다니, 무슨 신종 음식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메주’와 ‘치즈’의 만남은 식탁이 아닌 사전에서 이루어졌다.
1890년 요코하마에서 출판된 언더우드(H. G. Underwood)의 『한영ᄌᆞ뎐(韓英字典)』은 한국어와 영어를 대응시킨 최초의 사전이다. 제1부 한영사전과 제2부 영한사전으로 구성된 이 사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어를 배우던 외국인들과 영어를 배우던 한국인들에게 널리 활용되었다.
1859년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는 1872년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된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으로 입국한 뒤 목회뿐 아니라 의료 활동, 고아원 설립, 성경 번역, 지방 선교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 갔다.
언더우드는 한국어 교사를 고용해 틈틈이 한국어를 배웠는데 당시에는 한국어 문법서나 사전이 없었기 때문에 학습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언더우드는 자신이 직접 사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수년간 단어를 수집하고 사전 원고를 집필했다.
비록 소사전이긴 했지만 수천 개의 단어를 상대 언어로 정확히 풀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확한 대응어가 존재하지 않는 단어의 경우, 소통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을 동원해야 했다. 영어의 ‘cheese’를 메주에 빗대어 풀이한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이다.
『한영ᄌᆞ뎐』이 편찬될 당시 치즈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낯선 음식이었다. 치즈를 본 적이 없는 한국인들에게 그 뜻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언더우드는 ‘소졋메쥬’라는 표현을 고안해 냈다. ‘소졋’은 치즈의 주재료인 우유를 나타낸 것이고 ‘메쥬’는 치즈의 모양을 한국의 메주에 빗댄 것이다.
메주와 치즈의 만남은 『한영ᄌᆞ뎐』 제1부의 ‘메쥬’와 ‘두부’ 항목에서도 확 인된다. 언더우드는 메주를 ‘소스를 만들기 위한 콩 치즈(Bean cheese for sauce making)’라고 풀이하였고, 두부를 ‘콩 치즈의 일종(A kind of bean cheese)’이라고 풀이하였다.
『한영ᄌᆞ뎐』의 이러한 풀이는 서로 다른 두 문화 간의 접촉이 시작되던 당시의 언어적 풍경을 생생히 보여 준다. 메주를 처음 본 서양인이 ‘치즈처럼 생겼는데 재료가 다르네!’ 하는 모습도, 치즈를 처음 본 한국인이 ‘메주처럼 생겼는데 재료가 다르네!’ 하는 모습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유사한 개념을 활용하여 두 언어 간의 상호 이해를 도모한 흔적은 『한영ᄌᆞ뎐』 전반에서 두루 확인된다. 서양의 간식인 비스킷을 ‘작은 조각으로 구운 떡’이라고 한 것이나 사탕을 ‘엿’이라고 한 것도 식문화의 차이를 유사 개념을 활용해 연결 지은 사례이다. 서양식 모자를 한국의 ‘갓’에 대응시킨 것이나 외투를 ‘두루마기’에, 양말을 ‘버선’에 대응시킨 것도 같은 경우이다. 심벌즈를 ‘꽹과리’로 풀이한 것이나 베란다를 ‘툇마루’로 풀이한 것도 흥미롭다.
한편, 『한영ᄌᆞ뎐』 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보면, 오늘날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가 언더우드의 사전 편찬 당시에는 널리 쓰이던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의 산업 및 제도와 관련된 ‘식민지, 경제, 이민, 수출, 공장, 혁신, 오염’은 20세기 동안 한국어 어휘 체계에 정착한 근대 신어이다. 해당 영어 단어에 대한 한국어의 대응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영어 단어의 의미를 쉬운 한국어로 풀어서 서술함으로써 근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였다.
영어의 ‘factory’는 ‘물건 만드는 집’으로 풀이되다가 점차 ‘공장’과 등치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전에는 없던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확산됨에 따라 이를 표현하는 신어들이 우후죽순 생겨 났고,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누적된 끝에 현대 한국어 어휘 체계의 근간이 확립되었다. 언더우드의 『한영ᄌᆞ뎐』은 그러한 변화의 출발점에 선 한국어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최초의 한영·영한사전의 지면에 나타난 한국어와 영어의 대응 관계는 이후 한국어 어휘 체계에 나타날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해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글: 안예리(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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