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너무 잘한 것 같다’라니요?

튼씩이 2021. 3. 17. 19:32

시장을 지나가는데 어디에선가 고소한 냄새가 발걸음을 잡는다. 고개를 돌리니 가게 앞 진열장에 참기름병이 나란히 놓였다. 이름표도 없는 옥색 병 앞에는 ‘진짜 100프로 순참기름’이란 말이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었다. 참기름만 담았다는 심정을 강조하고 싶었을 노부부의 마음이었으리라. 1차로 ‘순(純)’을 덧붙이고 2차로 ‘100프로’라고 강조하고, 3차로 ‘진짜’를 동원해야 할 만큼 심히 강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시대가 곧 서로를 못 믿는 시대라는 속뜻으로 읽혀, 마음에 큰 돌 하나가 달린 듯했다.

 

강조해야 살아남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공짜도 ‘꽁짜’여야 눈 돌리고, 사랑보다는 ‘싸랑’이 멋있고, 새것이나 생것은 ‘쌔’, ‘쌩’이어야 알아듣는다. 오죽하면 한국어를 제대로 배운 외국인들이 책에서 배운 ‘공짜’가 맞는지, 길거리 유리창에서 보는 ‘꽁짜’가 맞는지 헷갈려할 정도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사람이 왜 ‘공짜’를 알면서도 ‘꽁짜’라고 쓰고 있는지 궁금해하는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어느 사회에나 있는 강조법 중 하나라고 답하곤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강조법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우선 첫소리에 힘을 줄 때가 많다. 경험담을 과장스럽게 하는 사람의 말에서 ‘ㄲ, ㄸ, ㅃ, ㅆ, ㅉ’가 많이 들린다. 이러한 된소리가 청소년들의 은어에 특히 많은 편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원래 쓰던 말에다가 인상을 강조하는 말을 덧붙여 쓰는 것이다. ‘최(最)’나 ‘초(超)’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강조하기란 습관이 되기 쉬워서인지 곧 익숙해지면 또 다시 ‘슈퍼 울트라 초 무엇’과 같이 여러 말을 겹쳐서 쓰고야 만다.

 

 

 

 

 

 

사실 ‘슈퍼, 울트라, 초’는 한때 지나간 유행어다. 지금은 ‘핵’의 시대인 듯하다.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핵 맛있고, 핵 예쁘고, 핵 좋은 것’이란 표현이 넘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오랫동안 낮은 품질을 이르던 ‘개’가 ‘핵’과 같이 쓰이는 점이다.

 

‘개’는 헛되고 쓸데없는 것,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 것을 이르는 표현이었는데, 청소년 은어에서 ‘개이득’은 큰 이익을 얻는다는 의미니 어떤 연유일까? 신문 기사에 따르면 청소년 10명 중 7명 이상이 신조어와 유행어, 줄임말을 사용한다. 청소년의 신조어와 유행어는 단순히 유행을 따르거나 습관적인 것만이 아니다. 청소년은 그들의 말을 일종의 문화를 드러내는 말로 인식하고 있다. ‘개’의 의미도 청소년의 문화 정체성으로 재구성된 것인가?

 

또 다른 말들로 ‘진짜, 정말, 되게, 너무, 엄청’ 등등 강조의 부사가 있다. 그중에서도 ‘너무’가 가장 흔한 말이다. 우리말 ‘너무’는 ‘넘다’에서 온 것이니만큼, 말 그대로 ‘일정한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라는 뜻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너무 춥다, 너무 힘들다’와 같이 부정적 상황에 쓰여야 맞는다. 그런데 요즘은 ‘너무 좋아요.’, ‘너무 잘해요.’처럼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과하게 표현하는 ‘너무’가 선택받은 것은 그만큼 언중들이 강조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최근 어느 방송에서 ‘그거 엄청 사실인데’라는 말까지 들었다. ‘엄청 사실’이 있고, 엄청나지 않은 사실도 있는 것인지 순간 혼란스러웠다.

 

흥미로운 점은 강조하는 말을 이렇게 많이 쓰면서도, 말끝은 얼버무리고 마는 현상이다. ‘영화가 엄청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은 흔히 듣는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틀린 표현이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주체가 곧 자신인데 굳이 남의 생각을 추측하듯 표현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오늘 과장님 너무 잘하신 것 같습니다.’는 더욱 어색하다. 잘한 점에 대해서는 ‘지나치다’고 평가하고, ‘잘했다’는 의견은 추측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 같은 경우에는’이라고 운을 떼는 표현에도 자신을 숨기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굳이 어떤 경우를 특정하여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저는’이라고 해도 소통에 문제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런데도 ‘단지 어떤 경우’로 제한하는 이 말은 마치 자신을 보호하고자 성벽을 두른 느낌이다. ‘저 같은 경우에는’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말 습관을 거의 지각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새 중복 표현으로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란 말마저 생성해 낸다. 강조만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얼버무림의 정도도 더 심해질 수 있다. 어쩌면 사람들의 심리에는 강조와 책임 회피가 힘을 겨루며 같이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누리소통망에서 한국말에 대한 관심이 높다. 외국인들은 한국말을 ‘습니다의 언어’라고 말한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을 때, 말끝의 ‘습니다’만 들린다는 것이다.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실이었다. 말이란 그 시작과 끝 온통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거울이다. 이러할진대 말의 습관은 자칫 자신을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출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 내가 한 말은 어떠했던지 스스로 물어본다.

 

 

글: 이미향(영남대학교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