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100년 전 우리말 풍경 - 신선한 언어 감각으로 그려 낸 새로운 시대상

튼씩이 2021. 4. 15. 20:24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그리고 오디오 북까지, 21세기의 독서 방식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컴퓨터, 태블릿, 킨들,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20세기가 시작되던 무렵에도 인쇄 기계와 연활자의 도입, 종이의 대량 생산과 같은 기술의 발달이 독서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에 한글 사용의 확대, 근대 교육의 보급 등 문화적, 제도적 변화가 맞물리며 대중적 독서물이 급격히 성장했다.

 

 

 

▲ <그림 1> 신소설 표지: 이인직의 『치악산』(1908),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 이해조의 『춘외춘』(1912)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20세기 초에는 당대의 급변하던 사회상을 다룬 소설들이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신소설’로 불리던 이들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당시 한반도 안팎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개개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그려냈다. 갑오개혁 이후의 신구(新舊) 갈등을 한 가정의 가족사로 풀어 가기도 했고, 청일전쟁으로 고아가 된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유학을 가며 벌어지는 인생사를 통해 근대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신소설 작가들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조혼의 폐습을 비판하고 신학문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미신 타파 등 풍속 개량을 촉구하였다. 전문이 한글로 작성된 신소설은 당시 한자를 모르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독서물이었는데, 인구의 대다수가 한문을 모르는 비식자층이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신소설이 갖는 문화적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신소설이 한글로 작성된 최초의 소설은 아니다. 신소설의 등장 이전에도 이른바 ‘고전 소설’을 통해 한글 소설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의 한문 소설이 국내에 들어와 한글로 번역되어 사대부 여성과 중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고, 판소리계 소설 등 창작 소설도 조선 후기 동안 널리 읽혔다.

 

 

 

▲ <그림 2> 조선후기 고전 소설 『심청전』 필사본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신소설, 즉 ‘새로운 소설’이라는 명칭은 바로 이 고전 소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데, 이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 아니라 당대에 붙여진 것이었다. 최초의 신소설 작품으로 알려진 『혈의누』의 신문 광고에서 ‘신소설’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으며, 작품의 표지에도 ‘신소설’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1900년대 독자의 눈에 비친 신소설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 새롭다는 감각을 불러일으켰을까?

 

 

 

▲ <그림 3> 1907년 6월 2일자 『만세보』에 실린 신소설 『혈의누』 광고:
줄거리를 소개한 뒤 이 소설이 새로운 사상을 담고 있고 서양 소설의 문투를 본떴다고 하였다.

 

 

 

고전 소설과 신소설은 그 내용과 주제, 형식과 문체, 발행 형태 등 여러 측면에서 뚜렷이 구별되었을 뿐 아니라 언어 사용 양상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고전 소설과 달리 신소설에서는 대사가 지문과 분리되어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간접 화법이 아닌 직접 화법으로 제시되었다. 또한, 사건의 전개에 치중하던 고전 소설과 달리 신소설에서는 생생한 장면 묘사가 중시되었다.

 

 

 

▲ <그림 4> 신소설 『은세계』(1908) 본문: 지문과 대사가 분리된 것을 볼 수 있다.
신소설의 대사를 통해 20세기 초 구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서술 기법 덕분에 신소설에서는 구어적 성격이 강한 *상징어의 쓰임이 두드러졌다. 코를 실룩실룩하고, 연기가 무럭무럭 나오고, 휘적휘적 걸어가고, 호독독호독독 통탕퉁탕 소리가 나고, 잔디를 부드등부드등 뜯고, 졸려서 눈이 폭폭 감기는 등 신소설의 지면에는 여타 자료들에서 보기 힘든, 생동감 넘치는 100년 전 한국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상징어: 소리나 모양, 동작 따위를 흉내 내는 말. 의성어와 의태어로 나뉜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다룬 이야기에는 우는 장면이나 웃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1900년대의 울고 웃는 모습에 대한 묘사는 오늘날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인다. 신소설에는 ‘킥킥’ 웃는 사람이나 ‘엉엉’ 우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훌쩍훌쩍 우는 모습이나 빙긋 웃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비죽비죽 우는 모습이나 *쪽쪽 우는 모습, *빙글빙글 웃는 모습이나 *덩싯덩싯 웃는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비죽비죽: 언짢거나 비웃거나 울려고 할 때 소리 없이 입을 내밀고 실룩거리는 모양.

*쪽쪽: 요망스럽게 자꾸 우는 모양.

*빙글빙글: 입을 슬며시 벌릴 듯 말 듯 하면서 자꾸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는 모양.

*덩싯덩싯: 팔다리를 춤추듯이 자꾸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

 

 

끌끌 흐느끼고 싱끗 미소 짓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이야기에 몰입했을 20세기 초의 독자들을 마음속으로 그려 본다. 실제의 말을 옮겨 놓은 듯한 대사와 생동감 넘치는 장면 묘사는 작품의 호소력을 강화하는 언어적 장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소설은, 아직 음성으로 기록되지 않았던 20세기 초 한국어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소중한 기록 유산이다.

 

 

 

글: 안예리(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