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된, 언어에 대한 글에서 널리 확인되는 의식은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고유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언어학에서는 소위 훔볼트주의로 설명된다. 독일의 언어학자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1767-1835)는 인구어와는 그 구조가 전혀 다른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카비어를 연구하며 각각의 언어에는 그 언어 사용자의 고유한 민족성이 담겨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정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심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언어가 곧 민족정신의 표상이라는 훔볼트의 이른바 ‘세계관 이론’은 20세기 전반기 국내의 언어 담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언어는 민족성의 반영이고 언어의 진화는 곧 민족정신의 향상이며 언어의 발전 단계는 민족문화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훔볼트주의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해 있던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의 사상 조류에도 부합되는 언어 이론이었다.
▲ <그림 1> 『동아일보』(1926. 12. 23.)에 실린 최현배의 「조선민족 갱생의 도」제63회 연재물: 외솔은 ‘말은 민족정신의 반사경’이라고 하며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연구가 곧 우리 민족적 신문화 발달의 첫걸음이라고 하였다.
의식의 발달이 언어의 발달과 정비례한다는 전제는 그 발달의 정도를 일정한 척도에 따라 나누고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야만의 민족은 야만의 언어를, 문명의 민족은 문명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중구난방으로 사용하는 한글 표기법을 정비하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어문 규범화의 기반이 되는 사전을 편찬하는 것은 모두 민족문화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언어의 진보로 여겨졌다.
20세기 초에 진행된 어문 규범화는 대부분 문어의 개량을 위한 것이었지만, 구어의 개량을 통해 민족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최고의 만담가로 불리던 신불출(申不出, 1907-1969)도 그러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출하였다. 신불출은 『삼천리』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는데, 그중 1935년 11월에 발표한 「만담: 언어 아닌 언어」와 1938년 5월에 발표한 「인사를 고쳐 하라」라는 글에서 인사말의 개량을 역설하였다.
▲ <그림 2> 1929년에 창간된 대중잡지 「삼천리」(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한국어의 인사말에 대해 신불출이 문제시한 점은 인사말이 실질적 의미가 없이 공허하다는 점과 지나치게 애상적이라는 점이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어데 가심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디에 가는지를 꼭 알아야 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입버릇으로 묻는 말이며 듣는 사람 역시 “녜, 어데 좀 감니다!”라고 하여 도무지 말뜻이 성립되지 않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신불출은 이러한 인사 교환은 오직 막연한 느낌만을 전달할 뿐 생활 속의 진실한 사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 <그림 3> 조선일보(1934. 7. 12.)에 실린 신불출의 평양 만담 대회 성황을 알리는 기사와 만담회장 사진
또한 “진지 잡수섯슴니까?”라든지 “안녕히 주무섯슴니까?” 같은 인사말은 과거 천재지변과 각종 난리가 많아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던 사람들이 많았던 어려운 시절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며, 오늘날의 현실도 옛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가난 박복하고 불행 참담하지만 그렇다고 궁상스러운 인사까지 계속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늘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 것은 밤낮 굶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 사회, 자다가 경을 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숙명적 단념의 참혹한 인사”이자 “자살적 비명”이라며 거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야! 즐거운 아츰이다.”라든지 “바람이 부는구나.”라든지 “좋은 날세로구나.”라든지 “얼골 빛이 좋쿠나.” 등의 인사말로 밝고 긍정적인 인사를 나누며 새로운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고 하였다.
만담가로서 신불출은 일제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도 절묘한 언어유희와 날카로운 풍자로 피지배 민족의 울분을 풀어내고자 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밤낮 찌푸리고 앉아 소극적으로 탄식만 하지 말고 유쾌함을 밑천 삼아 억척스럽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가 가진 만담의 기본 정신이었다. 인사말에 대한 태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글: 안예리(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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