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쉼표,마침표(국립국어원 온라인소식지)

한국어 교육, 그리고 우리 - 앞으로 쭉 가세요

튼씩이 2022. 2. 11. 08:01

“똑바로 가세요. 그리고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세요.” 외국어로 길 찾기를 배울 때면 한 번쯤 입으로 해 본 말이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책에는 길에서 위치를 묻거나 안내하는 표현들이 꼭 있다. 길 찾기를 연습하는 단원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책에도 대부분 있다. 그런데 여러 번 생각해 봐도 나는 길에서 책에 나오는 대로 말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의 길 위에서 안내하는 것이 책에서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국의 일상생활에서는 방향을 주로 ‘앞’과 ‘뒤’, ‘옆’으로 말한다. ‘앞’이란 사람이 향하고 있는 곳이고, 그 반대쪽이 ‘뒤’이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에게 가까운 곁은 모두 ‘옆’이다. 앞은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인 만큼 가장 많이 쓰일 말이다. 집 앞에 있는 뜰은 ‘앞뜰’이고, 집과 마을 앞에 길이 있으면 ‘앞길’이다. 마을 앞에 벌판이 있으면 ‘앞벌’이고,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앞바다’이다. 남향집에서 자고 일어나 앞문을 열면 ‘앞산’ 또는 ‘남산’이 있다. 한편, 집 ‘뒷마당’에는 ‘뒤뜰’이 있고 ‘뒷간’이 있다. 그리고 배경처럼 깔린 산이 있다면 그 산 이름은 ‘뒷산’이다.

 

 

 

 

앞과 뒤가 여러 말에서 쓰이는 것과 같이, 길을 알려 줄 때도 앞과 뒤, 옆이 많이 쓰인다. 한 예로, “저기 병원 보이시죠? 저기에서 옆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일단 병원 앞에 가셔서 다시 물어보세요.”라고 하는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길을 말해 주면서 눈앞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예측하여 설명하지는 않는 편이다. 실제로 새로 계획하여 지은 도시가 아닌 한, “똑바로 가세요.”를 적용할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길이 자연스럽게 굽어져 집의 방향도 조금씩 다르고, 앞이 분명하게 설정되지 않으니 ‘오른쪽’과 ‘왼쪽’도 부정확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구조를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보통 어떻게 시작할까? 혹시 ‘문을 열면 현관 바로 앞에 거실이 있고, 거실 옆에 방이 하나 있고, 거실 맞은편에는 부엌이 있고…’와 같이 시작하지 않는가? 한국 사람의 머릿속은 객관적인 동서남북보다 앞과 뒤, 옆이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방향을 정확히 묘사한다면, ‘우리 집은 가로로 긴 사각형인데, 집이 남향이에요. 현관은 남쪽에 있고, 거실은 북쪽에 있어요.’와 같이 말해야 한다. 그런데 20년 넘게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 봤지만, 동서남북으로 방향을 말하는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극소수였다. 신문 기사쯤 되면 ‘역사관은 정문을 기준으로 본관 뒤에 있다’라는 정도로 표현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기준점을 짚으며 말하는 것은 아주 드물다.

 

 

 

 

그러면 동서남북, 또는 오른쪽과 왼쪽은 절대적인 개념일까?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모인 한국어 교실 안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거실 그림을 보면서 사물의 위치를 말하는 시간이었다. 눈앞의 그림에는 한가운데에 소파가 있고, 그림 오른편에 피아노가, 왼편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 “피아노가 어디에 있어요?”라는 질문에 학생들 대부분이 소파 오른쪽에 있다고 말하는데, 한 학생만 고집스럽게 “소파 왼쪽에 있어요.”라고 답했다. 이집트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방향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한국말로 오른쪽과 왼쪽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유를 묻자, “만물에는 영혼이 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랬다. 소파의 처지에서 보면 피아노가 소파의 왼쪽에 있는 셈이다. 신념을 달리하면 다른 방향이 된다. 다음 해, 새로 온 유학생이 똑같은 그림을 보고서 “소파 왼쪽에 있어요.”라고 말했다. 돌아보니, 그도 같은 세계관을 가진 이집트 학생이었다.

 

한국어 교재 안에 ‘길 찾기’, ‘길 안내하기’가 기술되어 있으면, 한국어 교실에서는 이것으로 다양한 연습을 진행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의 삶터가 동서남북으로 설명되지 않아서인지, 여전히 입에 붙지 않는 한국말일 때가 많았다. 오른쪽, 왼쪽처럼 방향을 말하는 어휘는 여러모로 유용한 것이지만, 반듯하게 그려진 길을 보면서 하는 연습용 말은 한국인 선생님에게도 어색하다. ‘사거리를 건너서 영화관이 보이면 그다음에…’처럼 화자의 시야를 벗어나는 길까지 하는 말은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 수많은 외국어 중 하나로서, 한국어 교재에는 외국어 교재들과 비슷한 내용이 실리기 마련이다. 특히 영어 교재에서 익숙했던 표현은 한국어 교재에 의심 없이 대화문으로 녹아든다. 그런데 말이 삶이고, 삶이 곧 말이지 않은가? 한국어 학습자와 어색한 표현을 연습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주제가 한국어 교육에서 꼭 가르칠 내용인지, 그 단원에서 교육용으로 의미가 있을 적절한 표현은 어디까지일지, 한국어 교실에서는 늘 고민하고 있다.

 

 

 

이미향(영남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