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흙비가 내렸으니 하늘이 내리는 벌이 가볍지 아니하다. 예전에 수(隋)나라 황제가 산을 뚫고 땅을 파며 급하지 아니한 역사(役事)를 하자 마침 하늘에서 흙비가 내렸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번거롭게 일으키므로 백성의 원망이 ’흙비‘를 부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숭례문(崇禮門)의 역사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급하지 아니한 역사는 아니겠는가?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는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
이는 《성종실록》 성종 9년 4월 1일(1478년) 기록입니다. 이런 흙비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183번이나 나옵니다. 심지어 태종 6년(1406년)에는 동북면(東北面) 단주(端州, 함경남도 단천)에 흙비가 14일 동안이나 내렸다고 하고, 세종 1년(1419년) 3월 13일에는 흙비가 내려 젖은 곳이 새까맣게 되니 ‘먹비’라 하였다고 했으며, 세조 13년(1467년) 5월 28일에는 어유소(魚有沼)가 거느린 군사는 흙비로 인하여 군사의 복장과 장비는 물론 기계(器械)가 거의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흙비를 막으려고 몽골 사막에서 ‘수원시민의 숲’을 조성하고 있는 수원시민들(수원시청 제공)
해마다 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황사가 옵니다. 황사는 중국과 몽골의 사막과 황토지대의 흙가루가 우리나라 하늘까지 날아와 떨어지는 것인데 《삼국사기》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면 이 황사현상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는 ‘황사(黃砂)’가 아니라 ‘흙가루’와 ‘흙비’ 한자 말로는 토우(土雨)ㆍ매우(霾雨)라고 되었습니다. 조선 말기까지도 우리는 ‘흙비’라는 말을 썼는데 일제강점기 때 ‘누런 모래’라는 뜻의 ‘황사(黃砂)’가 들어와서 주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말이 사라지고 일본말로 바뀐 것은 ‘장황(粧潢)’이 ‘표구(表具)’로 된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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