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739

(얼레빗 제5065호) 고풍을 자아내는 ‘짐승얼굴 무늬 청동화로’

국립중앙박물관에는‘짐승 얼굴 무늬 풍로(귀면 청동로)’라고도 불리는 국보 가 있습니다. 높이 13.0cm, 입지름 14.5cm 크기의 청동로 겉모습은 파손 없이 거의 완전한 상태이지만, 표면 전체에 청동의 푸른 녹이 덮여있고 솥 안쪽에 불덩이를 받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 받침판이 없어졌지요. ▲ 국보 ‘짐승얼굴무늬 청동 화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솥 모양의 동체를 다리가 받치고 있으며, 몸통 윗부분에는 돋을새김으로 도철문(종교의식에 사용한 청동그릇과 기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얼굴 모습을 한 무늬)이 표현돼 있습니다. 또 몸통 아랫부분에는 귀신 모양을 상상한 통풍구를 만들어 뚫었습니다. 아가리는 3개의 삼각형 모양이 솟아 있고, 몸체 옆면에는 각각 2개의 고리가 붙어 있으나 손잡이 장..

「달성 유가사 영산회 괘불도」 보물 지정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조선 후기 괘불도인 「달성 유가사 영산회 괘불도」를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하였다. 「달성 유가사 영산회 괘불도(達城 瑜伽寺 靈山會 掛佛圖)」는 1993년 도둑맞았다가 2020년 환수한 유물로, 화기(畫記)를 통해 1784년이라는 제작 연대와 ‘영산회’라는 주제를 명확히 알 수 있는 불화다.* 화기: 불화 하단에 제작 연대, 봉안 장소, 제작 목적, 시주자, 제작자 명단 등을 적은 것 ▲ 달성 유가사 영산회 괘불도 도난 과정에서 화기 일부가 훼손되어 이 불화를 그린 승려들은 알 수 없지만 머리와 얼굴의 형태, 신체의 비례와 표현 감각, 각 도상의 배치와 곳곳에 쓰인 다양한 무늬 소재 등으로 볼 때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유성(有城) 화파(畫派)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의친왕가(家) 복식」 국가민속문화유산 지정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이 소장한 「의친왕가 복식(義親王家 服飾)」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의친왕가 복식」은 의친왕비(義親王妃) 연안 김씨(1880~1964)가 의친왕(1877~1955)의 다섯째 딸 이해경(李海瓊, 1930~) 여사에게 전해준 것으로, 왕실 여성의 예복 가운데 겉옷인 원삼(圓衫)과 당의(唐衣) 및 스란치마, 머리에 쓰는 화관(花冠), 노리개, 그리고 궁녀용 대대(大帶, 허리띠)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이 이해경 여사로부터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다. * 의친왕비: 궁내부특진관 등을 지낸 김사준(金思濬, 1855~?)의 딸이며, 본명은 김덕수(金德修). 1893년 간택 과정을 거쳐 고종(高宗)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1877~1955)과..

(얼레빗 제5064호) 「고령 대가야」, 5번째 고도(古都)로 지정

국가유산청은 지난 2월 18일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을 일부를 개정해 「고령 대가야」를 새 고도(古都)로 지정하였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우리 민족의 정치ㆍ문화의 중심지로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을 고도(古都, 예전 서울이었던 도시)로 지정하는데, 고령을 포함하여 2025년 2월 현재 경주ㆍ부여ㆍ공주ㆍ익산이 지정돼 있습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령 지산동 고분군’ 전경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대가야는 왕위 세습체계, 중국식 왕호(王號)의 사용, 예악문화(가야금과 우륵 12곡), 시조탄생 신화(정견모주 신화), 매장의례(순장)를 갖춘 중앙집권적 나라이자, 고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한 국가였지요. 5세기 후반 대가야의 영역은 현재의 고령뿐..

토박이말의 속살 16 - ‘사람’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사람’이란 참으로 무엇인가 싶다. 어버이를 죽이는 자식이 있더니 자식을 죽이는 어버이까지 나타나고, 돈 몇 푼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서슴없이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이틀에 셋씩이나 나타난다. 이 좁은 땅에서 피를 섞으며 살아온 우리가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앞으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값지고 복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선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을 뭐라 풀이하는지 알아보자. ① 생각과 말을 하고 기구를 만들어 쓰며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② 자연과 사회의 주인으로서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발전되고 힘 있는 사회적 존재.③ 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남녘의 국어사전인 ①《우리말..

(얼레빗 제5063호)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동의보감》

《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1738년) 2월 21일 기록에는 “청나라 사신이 《동의보감(東醫寶鑑)》, 청심환(淸心丸) 50환과 다리[髢髮] 두 묶음만 구하여 갔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중국에서 펴낸 《동의보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암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큰 인기를 끌었던 《동의보감》이 몹시 탐나서 꼭 사고 싶었지만 5냥이나 되는 책값 마련이 어려워, 결국 중국어판 서문만 베껴온 것을 두고두고 섭섭해했습니다. ▲ 국보 《동의보감(東醫寶鑑)》,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중국어판 서문을 쓴 능어(凌魚)는 “구석진 외국책이 중국에서 행세하게 되었으니 담긴 이치가 훌륭하다면 땅이 먼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동의보감》은 내경(內景)을 먼저 서..

(얼레빗 제5062호) 오늘 우수, 유년의 봄날이 흑백 필름으로 돌아

우수 무렵                                        - 김경실​      여린 살 차가와 선뜻 다가서지     못해 동구 밖 서 있었습니다.​      몇날 며칠 헤살대던 바람     지나는 마을마다 무작정 풋정     풀어놓고 입춘 지나 저끝     마라도로부터 북상해 갔습니다.​      버들강아지 산수유 제가끔 제     몫으로 이 나라 산야에서     야무지게 봄물 오를쯤​      이젠 옛이야기로 남은 허기진     유년의 봄날이 흑백 필름     거꾸로 돌아     모두 한꺼번에 살아옵니다.     우수 무렵  ▲ 오늘은 우수, 대동강물도 풀려 빨래하기 좋아(그림 이무성 작가)  위는 김경실 시인의 시 입니다. 시인은 우수가 되니 “얼여린 살 차가와 선뜻 다가서지 ..

(얼레빗 제5061호) 일식과 월식이 있으면 구식례를 행했다

“5경(3시와 5시 사이)에 개기월식을 하였다. 대궐 뜰에서 월식을 구제하는 의식을 했다. 승지 1명과 사관(史官) 2명이 관상감의 관원 5명을 거느리고 오방(동서남북과 중앙)에 장막을 쳐놓고 오색 깃발 각 1개와 창ㆍ긴창ㆍ검(劍)ㆍ극(戟,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긴 창)ㆍ창(槍, 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이 선 뾰족한 쇠촉을 박아서 던지고 찌르는 창) 각 5개와 징 5개를 설치하고 악공으로 하여금 징을 치게 하다가 달빛이 다시 둥그렇게 된 뒤에 끝냈다.“ ▲ 붉은 달과 개기월식이 보여주는 장관(오종실 작가) 이는 《선조실록》 184권, 선조 38년(1605년) 2월 16일 기록입니다. 일식(日蝕) 곧 해가림과 월식(月蝕) 곧 달가림은 요즘뿐이 아니고 고려, 조선시대에도 있었는데 이 해가림과 달가림이 있으면..

우리 토박이말의 속살 15 - ‘본풀이’

‘본풀이’는 무속의 제의인 ‘굿’에서 쓰는 낱말이다. 굿은 여러 ‘거리’로 이루어지는데, 거리마다 한 서낭님을 모시고 굿을 논다. 이를테면 ‘가망거리’에서는 가망서낭님을, ‘제석거리’에서는 제석서낭님을, ‘장군거리’에서는 장군서낭님을 모시고 논다. 굿거리의 짜임새는 대체로 맨 먼저 서낭님을 불러 모시고, 다음에 서낭님을 우러러 찬미하여 즐겁게 해 드리고, 이어서 굿을 벌인 단골의 청원을 서낭님께 올리고, 다음에는 단골의 청원에 서낭님이 내려 주시는 공수(가르침)를 받고, 마지막으로 서낭님을 보내 드리는 차례로 이루어진다. ‘본풀이’는 이런 굿거리의 차례에서, 서낭님을 불러 모시는 맨 처음 대목에 무당이 부르는 노래면서 이야기다. 노래에 담긴 이야기는 불러 모시고자 하는 서낭님이 어떻게 해서 서낭님의 몫을..

(얼레빗 제5060호) 우리땅에 맞는 농업서 《농사직설》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여러 도(道)의 감사와 주ㆍ군ㆍ부ㆍ현과 서울 안의 2품 이상의 관원에게 나눠주고, 임금이 말하기를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왕정(王政)의 근본이므로, 내가 언제든지 농사에 정성을 쏟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년) 2월 14일 기록입니다. 세종 때 정초(鄭招)ㆍ변효문(卞孝文)이 펴낸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찾아서 쓴 것으로 그동안 중국에만 의존했던 농사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농업서입니다. 나라의 뿌리인 농사가 생산력이 현저히 낮아지자, 백성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는데 이를 안타까이 여긴 세종임금은 고민 끝에 이런 현상이 조선 풍토에 맞는 농사법이 없어서임을 깨닫고 마침내 각 지방에 농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