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기구 3

손수 따비와 쟁기를 든 임금

손수 따비와 쟁기를 든 임금 “정결한 소와 염소로 선농(先農)에 정성껏 제사하고, 따비와 쟁기로 보전(甫田)을 몸소 밟으셨습니다. 빛나고 성대한 의식이 이루어지니 아름다운 상서가 이르렀습니다. (……) 사(詞)에 이르기를, ‘촉촉한 가랑비 꽃가지의 바람을 재촉하니, 동쪽 들의 버들이 봄빛을 띠게 됐네. 황도(黃道)에 먼지가 맑게 걷히니, 보연(寶輦)에 봄빛이 도네. 곤룡포·면류관 차림으로 몸소 따비 잡고 밭갈이하여, 우리 백성들 농상(農桑)에 힘쓰게 했네.’” 『성종실록』 24년(1493년) 3월 10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임금이 손수 따비를 들고 농사일을 해보는 것은 농사가 나라의 근본이던 조선시대에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따비와 쟁기 같은 농기구를 들고 논밭으로 나갈 농부들은 이제..

제주도 사람들의 강인함과 슬기로움을 보여주는 쌍따비

제주도 사람들의 강인함과 슬기로움을 보여주는 쌍따비 지난 2010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쌍따비를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따비는 대전 출토품으로 전하는 국보 유물인 농경문 청동기에 보이는 쌍따비와 같고, 근현대에 사용하던 따비와도 상당히 유사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비’는 삽고 같은 원리로 땅을 일구는 농기구의 하나입니다. 다만 삽과 다른 점은 날이 넓적한 삽처럼 흙을 베면서 파거나, 파낸 흙을 다른 곳으로 퍼 옮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비는 날이 하나인 ‘외따비’와 날이 둘인 ‘쌍따비’가 있습니다. 쌍따비는 크기가 보통 사람의 키보다 약간 길며, 무게도 외따비의 두 배 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 쌍따비를 다루기가 벅찰 수도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