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청정 8

세자의 대리청정 (2)

3. 왕세자의 조참 왕세자의 대리청정 절목을 보면 왕세자가 처음 대리청정을 할 때 조참을 한다는 규정이 있다. ʻ조참ʼ이란 국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회의 하나인데, 매월 아일(衙日, 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에 거행하는 조회이다. 이와 구분하여 매일 거행하는 조회는 상참이라 한다. 조참은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행해진 조회이다. 국왕이 정기적으로 거행했던 조참을 왕세자가 거행한 것은, 왕세자가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효명세자의 조참의식은 1827년(순조 27) 2월 18일에 중희당에서 거행되었다. 먼저 순조는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으로부터 대리청정을 축하하는 인사를 받고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는 반교문을 내렸다. 이는 대제학으로 있던 김이교가 ..

세자의 대리청정 (1)

세자의 대리청정 김문식 (단국대) 1. 왕위 계승을 공식화하는 의식 국왕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인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를 생전에 지정해 두었다. 이들은 국왕의 아들, 손자, 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선발되었고, 국왕이 주재하는 책봉식을 통해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로 공인을 받았다. 국왕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비중이 높은 사람은 왕세자였다. 왕세자와 관련된 의식에는 왕세자 책봉식, 왕세자가 성균관에 가서 교육을 받는 입학식,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는 대리청정이 있었다. 다음의 는 왕세자들이 책봉, 입학, 관례, 가례(혼인), 대리청정을 한 나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왕세자들은 대부분 10세를 전후하여 책봉, 입학, 관례를 연속적으로 거행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

세자의 공간, 동궁 (2) - 동궁의 위치와 구성

2. 동궁의 위치와 구성 개념적으로 동쪽에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더라도 그 위치가 명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대 왕조의 궁궐에서는 동궁을 임금의 영역 동쪽에 조성하였다. 자금성 등 중국의 궁궐도 그러하고, 개경의 경우 『고려도경』에 ʻ동쪽 문에는 ʻ春德ʼ이라 편액했는데, 세자궁으로 통한다 ~ 좌춘궁은 회경전 동쪽 춘덕문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가 처음으로 책봉되면 세자라 하고, 관례 이후 여기에 거처했는데, 옥우의 제도는 왕궁만 못하다.ʼ라고 하여 세자궁이 명실상부하게 동쪽에 있는 동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궁 전각은 대체로 ʻ당堂ʼ호를 갖고 있다. 임금의 전각이 ʻ전殿ʼ으로 지칭되는 것과는 차등을 둔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 임금의 전각은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으로 ʻ전호ʼ..

조선의 세자 - 세자의 대리청정

7. 세자의 대리청정 대리청정(代理聽政)은 국왕이 건강상의 이유로 통상적인 정사를 돌보기 어려울 때 차기 왕위계승자인 왕세자[또는 왕세손]가 국정을 대신하여 다스린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ʻ청정(聽政)ʼ으로 불리었으며, 때로는 ʻ대리(代理)ʼ로 약칭되기도 했다. 대리청정 시 왕세자 및 왕세손을 소조(小朝)라 하고, 국왕을 대조(大朝)라 했다. 이는 대체로 군권 및 인사 등은 국왕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으면서 대권을 행사하고 정사 실무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왕세자에게 허락된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대리청정의 기원을 《춘관통고》에서는 정종(定宗)년간 왕세자[태종]의 군국기무(軍國機務) 장악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향후 정착되는 대리청정기에 여전히 국왕이 군권 및 인사권을 장악하는 현상과는 전혀 다..

조선의 세자 - 세자란 누구인가

조선의 세자 정 재 훈 (경북대) 1. 세자란 누구인가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세자는 왕조시대 당대의 국왕을 이어서 다음 대의 국왕이 되는 후보자를 가리킨다. 세자를 가리키는 말은 동궁(東宮)ㆍ저궁(儲宮)ㆍ춘궁(春宮)ㆍ이극(貳極)ㆍ정윤(正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존칭어로는 저하(邸下)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세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세자인데, 이 용어는 원래 고려 말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태자가 격하되면서 쓰이게 된 것이다. 세자 또는 태자는 우리 역사에서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왕위의 부자세습이 결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세자가 존재하게 되었고, 이후 대체로 장자로 결정되는 것이 관례였다. 고려 때의 〈훈요십조〉에서는 이를 규범화하기도 하였다. 즉, 적자(嫡子)에게 나..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2), 어책

2) 어책 어책(御冊)에는 왕세자 시절에 받는 죽책(竹冊)과 국왕 시절에 받는 옥책(玉冊)이 있다. 죽책은 국왕이 왕세자․왕세자빈을 책봉할 때와 존호 및 시호를 수여할 때 사용하였다. 왕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교명, 죽책과 함께 은인을 주었다. 죽책은 죽간 5~6조각을 책자 형태로 엮어 해서체 글자를 새기고 글자에 니금(泥金)을 입히며, 변철로 고정하여 둥근 고리와 돌쩌귀로 연결한다. 죽책의 앞뒷면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죽책의 문장은 사륙변려문을 쓰며, 착한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효명세자는 1812년(순조 12) 7월 6일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자 책봉식을 거행하였다. 세자의 나이는 4세였다. 다음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내린 죽책문의 내용이다. 저사(儲嗣, 후계자)를 ..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1), 어보

1) 어보 어보(御寶)는 국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말한다. 왕세자 시절에 받는 은인(銀印)과 국왕 시절에 받는 금보(金寶)가 있다. 국왕의 새로운 이름이 정해지면 이를 기록한 어보와 어책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국왕이 새로운 이름(존호, 묘호, 시호, 전호, 능호)을 받을 때마다 어보는 새롭게 만들어졌다. 국왕이 왕세자를 책봉할 때 교명(敎命), 죽책(竹冊)과 은인(銀印)을 내렸다. 왕세자의 은인에는 ‘왕세자인(王世子印)’이라 새겼다. 왕세자인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때는 대리청정을 할 때이다.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 왕세자의 명령서나 관리 임명장에 이 은인이 찍혔다.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을 때 받는 책봉인도 어보에 해당한다.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 새겨진 책봉인은 중요한..

(얼레빗 4165호) 문예군주를 꿈꾼 효명세자 특별전

“홀로 만향헌에 앉아서 서글피 인왕산을 마주했도다 하늘은 넓고 구름 빛도 맑은데 돌아간 기러기는 어느 때에 돌아올까“ ▲ 효명세자가 명온공주에게 보낸 편지 속의 한시 이는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명온공주(明溫公主)에게 보낸 편지로 한시에 음을 나란히 적고 한글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