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 6

통신사행 여정의 기록, 사로승구도

는 1748년(영조24), 조선의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부터 일본의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모두 30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장면에는 통신사행의 여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명승지와 사행 중 겪은 인상적인 순간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18세기 조선,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다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 중국과 일본의 침략을 받아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큰 전쟁을 치르며 많은 고난을 겪었던 조선은 18세기에 이르러 점차 평화와 안정을 되찾으며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사행단을 파견하며 활발한 대외교류 활동을 펼쳤습니다. 조선의 외교사절단들은 몇 달에 걸쳐..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3), 교명과 고명

3) 교명과 고명 교명(敎命)은 국왕이 왕위를 물려주거나 왕비와 왕세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는 훈유문서이다. 국왕이 왕비를 책봉할 때는 교명, 옥책, 금보를 주고, 왕세자를 책봉할 때는 교명, 죽책, 은인을 주었다. 교명은 옥축(玉軸)에 비단으로 감싸서 만든 두루마리로, 오색 비단에 먹으로 글씨를 썼다. 교명의 시작 부분에 용 두 마리가 오르내리는 사이에 ‘교명(敎命)’이라는 전서체 글자를 직조하여 넣었다. 교명에는 조선왕보(朝鮮王寶)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은 것이 있다. 교명의 내용은 그 지위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책임을 다할 것을 훈계하고 깨우쳐 준다. 조선 전기에는 국왕이 왕위를 물려줄 때에도 교명을 내렸다.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할 때,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할 때,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 교명..

사랑방에 꼭 있었던 선비의 애장품, 고비

사랑방에 꼭 있었던 선비의 애장품, 고비 조선시대 선비의 사랑방에는 책을 놓고 읽거나 붓글씨를 쓰던 서안(書案), 사방이 트여 있고 여러 단으로 된 사방탁자(四方卓子), 여러 권이 한 질로 된 책들을 정리·보관하는 궤인 책궤(冊櫃), 안방의 보료 옆이나 창 밑에 두고 편지·서류나 일상용 기물을 보관하는 문갑(文匣) 같은 가구가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비들이 아끼던 ‘고비’도 있었습니다. 고비는 벽에 걸어놓고 편지나 두루마리 같은 것을 꽃아두는 실내용 세간을 말합니다. 가벼운 판자나 대나무 같은 것으로 만드는데, 위아래로 길게 내려 걸도록 했지요. 등판과 앞판 사이를 6~9cm쯤 떼어 2~3단 가로질로 놓음으로써 편지를 넣어두도록 했지요. 또 두꺼운 종이로 주머니나 상자 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종이띠를..

(얼레빗 4446호) 석가탑 사고 덕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

1966년 9월 6일 낮 2시쯤 경주 불국사 범영루 보수공사를 하고 있던 한 공사감독이 석가탑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여 경주시 교육청에 알렸습니다. 경주 교육청에서는 현장에 나가 확인한 결과 석가탑 2층 탑신의 서편이 사방 1자가량 떨어져 나가고 3층 탑신에 금이 생기는 등의 이상을 밝혔지만, 상처가 생긴 확실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였지요. 이후 불국사의 석가탑 훼손 사항을 조사한 문화재위원 황수영 동국대 교수는 현지조사를 마친 뒤 훼손의 원인은 사리장치를 노린 탑도둑의 짓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 출토 당시의 이후 9월 30일에 열린 피해문화재 수습대책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석가탑에 대한 해체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그런데 석가탑 복원을 위한 해체작업을 진행하던 중 10월 13일 낮 불의의 사고가 발생합..

(얼레빗 4393호) 벼슬하지 않고 시나 읊으며 살아가리

지창토벽 紙窓土璧 흙벽에 종이창 내고 종신포의 終身布衣 평생 벼슬하지 아니하며 소영기중 嘯咏其中 시(詩)나 읊으며 살아가리 ▲ &lt;포의풍류도&gt;, 김홍도, 종이에 수묵담채, 27.9×37㎝, 개인소장 단원 김홍도의 그림 &lt;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gt;의 화제(畵題)입니다. 그림 속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