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 8

임시정부에서 탄핵받은 이승만, 독립운동가 아니다

지난 12월 29일 보훈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고 발표했다. 보훈부는 "이승만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고,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한인자유대회 개최와 한미협회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라고 꼽은 까닭을 밝혔다. 하지만 이런 보훈부의 발표에 고개를 끄떡일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정말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뛰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국민을 버린 이승만이 웬 국부? 이렇게 보훈부가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은 데는 보훈부의 전 장관과 현 장관의 ‘이승만은 국부’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난해 8월 11일 한국일보의 기사에 보면 당시 박민식 장관이 "이 전 대통령의 공과 과에 대한 의..

최초의 낭독자

잠시 시계를 돌려 103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919년, 서울은 고종 황제의 장례를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종교 지도자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이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거국적인 민족 운동 예정일은 3월 1일 오후 2시로 잡혔다. 당일 정오 무렵부터 학생 수천 명과 사람들이 탑골 공원에 모였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민족 대표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인즉 이들은 전날 급하게 집결지를 인근의 요릿집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비폭력저항’을 대원칙으로 삼았기에, 인파와 일제 헌병 간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불안으로 술렁였다. ‘혹시 민족 대표들이 잡혀갔나?’ ‘거사는 실패인가? 이대로 해산해야 할까?’ 이때 한 청년이 팔각정으로 뛰어올랐다...

잊혀진 역사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전

서울시가 독립운동사에서 조명되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를 개최한다. 서울시가 운영 중인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는 류준화 작가의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전시를 기획, 광복절 기간인 8월 25일(목)까지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한다. 서울여담재는 공적인 영역에서 기록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았던 여성의 이야기를 수집·기록하며, 이를 새롭게 해석하고 연구해 서울 시민 및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기 위한 여성역사공유공간으로 ’21년 4월 문을 열었다. 작은 도서관, 전시공간, 교육공간 등을 운영하고 있다. 류준화 작가는 3·1운동,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에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없다는 궁금증을 기반으로, 이번 작품을 통해 3·1운동의 현장에서 드러나지 않았..

육당 최남선과 언행일치

우리나라 근대사는 일제강점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사람 중에 육당 최남선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언론인, 시인, 역사가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지요. 《소년》이란 잡지를 창건하고 독립선언서를 집필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였고 청년 시절 민족혼을 드높이고자 무던히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년에 일제에 협조하면서 친일 행적을 남기게 됩니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일제가 조선의 역사를 왜곡할 때 일조를 했던 사람이고 조선 유학생을 학병으로 나가게 하려고 강연을 하였는가 하면 일제의 침략 정책에 앞장서 온 변절자로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당연히 친일은 청산되어야 하고 독립운동가는 대우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역사의 준엄한 판단이지요. 수많은 사람이 일제에 협조하고 앞잡이..

(얼레빗 4607호) 33인 중 유일한 옥중 순국 양한묵 지사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인 1919년 오늘(5월 26일) 양한묵 애국지사가 서대문 감옥에서 향년 56살로 순국하였습니다. 양 지사는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체포당한 뒤 심문하는 담당검사에게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당당히 밝히며 항일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양 지사는 이렇게 당당하였기에 가혹한 고문이 집중되었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순국 한 분이 된 것입니다. ▲ 33인 중 유일한 옥중 순국한 양한묵 지사(국가보훈처 제공) 양 지사는 1904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를 설립하고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설립된 공진회에 힘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또 1905년에는 헌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

(얼레빗 4579호) 전, 예서에 능했으며, 독립운동 한 오세창 선생

굳건한 신념으로 가지고 많은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을 키워낸 이가 오세창 선생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은 아버지 오경석에게 이어받은 골동서화 감식안과 민족정신은 그의 집안뿐만 아니라 전형필 등을 민족문화유산 지킴이로 만들어냈지요. 또 그는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펴냈는데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입니다. ▲ 위창 오세창 선생(독립기념관 제공)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珍籍書畵)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로다. 십수 년 아래로 고..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3·1운동의 상징이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혼의 표상 유관순 열사는 조국의 독립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에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정사업본부는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괄괄한 성격에 성경 구절을 한 번 들으면 줄줄 외울 만큼 총명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사상을 깨우치고 기독교 바탕의 신문화를 배우면서 민족정신을 키워갔습니다. 유관순이 8살이었던 1910년, 우리 민족은 치욕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에 들어가게..

(얼레빗 4303호) 독립운동가며 교육운동가였던 이승훈 선생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그저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강산, 조상들이 지켜 온 강토를 원수 일본인들에게 내맡길 수가 있겠는가?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이 깨어나는 것이다." 이는 평안도 정주에서 오산 학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