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11

(얼레빗 제5061호) 일식과 월식이 있으면 구식례를 행했다

“5경(3시와 5시 사이)에 개기월식을 하였다. 대궐 뜰에서 월식을 구제하는 의식을 했다. 승지 1명과 사관(史官) 2명이 관상감의 관원 5명을 거느리고 오방(동서남북과 중앙)에 장막을 쳐놓고 오색 깃발 각 1개와 창ㆍ긴창ㆍ검(劍)ㆍ극(戟,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긴 창)ㆍ창(槍, 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이 선 뾰족한 쇠촉을 박아서 던지고 찌르는 창) 각 5개와 징 5개를 설치하고 악공으로 하여금 징을 치게 하다가 달빛이 다시 둥그렇게 된 뒤에 끝냈다.“ ▲ 붉은 달과 개기월식이 보여주는 장관(오종실 작가) 이는 《선조실록》 184권, 선조 38년(1605년) 2월 16일 기록입니다. 일식(日蝕) 곧 해가림과 월식(月蝕) 곧 달가림은 요즘뿐이 아니고 고려, 조선시대에도 있었는데 이 해가림과 달가림이 있으면..

(얼레빗 제5054호) 선조, 사서오경을 우리말로 뒤치라 했다

"무릇 글을 풀어내는 것을 어떤 이들은 소소한 일이어서 꼭 관심을 둘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지만 성현들의 하신 말씀이 ‘글 뜻을 알지 못하고서 정밀하고 자세한 내용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 지금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 한문의 한 구절 끝에 다는 토)과 뒤침(번역)은 경이 정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경의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함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사서와 오경(五經)의 구결과 뒤침을 경이 모두 자상하게 정해 놓았으니, 하나의 국(局)을 설치할 만하다.“ ▲ 《선조실록》 8권, 선조 7년(1574년) 10월 10일 기록 원문 위는 《선조실록》 8권, 선조 7년(1574년) 10월 10일에 있는 기록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의 임금으로서 너무 많은 오명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입니..

(얼레빗 제5011호) 임금이 내린 교지와 편지도 한글로 썼다

지난 10월 9일은 578돌 한글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세종임금이 만든 훈민정음이 조선시대 내내 ‘언문’이라 하여 푸대접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임금이나 왕비 등이 한글 편지를 썼음은 물론 교지도 한글로 써서 사실상 한글은 많은 이가 쓰는 글자였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때인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선조임금은 공식 문서인 교지에 언문을 썼지요. 교지를 쓴 때는 왜군이 7백여 척의 배를 앞세워 부산포로 쳐들어와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은 왜군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속속들이 관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선조는 탄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조실록》 25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로 방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민간을 알아듣게 타이르..

(얼레빗 제4968호) 한글학자 최현배, 비행기를 '날틀’이라 했다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이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을 해왔고 이때 민ㆍ관ㆍ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었다는 기록이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6일 기록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진주성 싸움에서는 “날틀”이 활약했었다고 합니다. 날틀은 한자말로 ‘비거(飛車)’라고 하여 하늘을 나는 차 곧 비행기의 하나입니다. 일본 쪽 역사서인 《왜사기》에도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썼는데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날틀은..

(얼레빗 제4817호) 왜적, 종묘에서 많이 죽어 나가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5월 3일 치 기록에 보면 “경성이 함락되자 도검찰사 이양원 등이 도망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뒷부분에 보면 “이때 궁궐은 모두 불탔으므로 왜적 대장 평수가(平秀家)는 무리를 이끌고 종묘(宗廟)로 들어갔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공격하는 바람에 적들은 놀라서 서로 칼로 치다가 시력을 잃은 자가 많았고 죽은 자도 많았었다. 그래서 평수가는 할 수 없이 남별궁(南別宮, 소공동에 있던 태종의 딸 경정공주가 살던 궁)으로 옮겼다.”란 기록이 보입니다. ▲ 국보 '종묘' 전전 전경(문화재청 제공) 는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에 보면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

선조 임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송언신

선조 임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송언신 200여 년이 지난 뒤에 그 일을 아뢰는 자가 있기에 가져다 보니 그 문장이 마치 운한(雲漢)이 밝은 빛을 내며 회전해서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어 상서로운 빛이 나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 듣건대 그의 집이 옛부터 한강 남쪽에 있는데 매우 가난하여 이 첩을 정성들여 걸어둘 곳이 없다 하므로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집(閣)을 지어주어 봉안(奉安)하게 하였고, 그에게 영양(榮襄)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어 그 자손을 찾아서 그 고을에서 먹여주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3년(1789년) 6월 5일 기록입니다. 송언신(宋彦愼, 1542∼1612년)은 선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낸 인물입니다. ..

임금의 꿈에 용으로 비친 장수, 정기룡

임금의 꿈에 용으로 비친 장수, 정기룡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은 인심을 얻었고 또 싸움도 잘하니 이제 당상(堂上)에 올리어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적이 만약 다시 움직이면 상주 낙동강을 막아 지키거나 혹은 물러나 토기(兎機)를 지키게 해야 할 것이며, 왜적이 움직이기 전에 도내에 있는 토적을 잡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선조실록』 27년(1594년) 8월 21일 기록입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국난을 이겨내는 데 큰 공을 세운 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 1562∼1622년) 장군은 선조 13년(1580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합니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되어 있는 정기룡 장군의 설화에는 그가 이름을 ‘기룡’으로 바꾼 이야기..

(얼레빗 4449호) 선조, 인원왕후 언문(한글)으로 교지를 쓰다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후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심지어 공식 문서인 교지에도 언문을 썼습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諺書)로 방문(榜文,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백성을 알아듣도록 하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 원활한 의사소통..

(얼레빗 4323호)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의병장 홍의장군

“의령에 사는 죽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병사를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중간 줄임)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붉은 비단 철릭..

(얼레빗 4305호) 이순신 장군, 1592년 오늘 거북선 완성

"바닷가 한 산에 왜적 1백여 명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전선 12척이 벼랑을 따라 죽 정박하고 있었다. (중간 줄임) '우리가 거짓 퇴각하면 왜적들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큰 군함(軍艦)으로 합동하여 공격하면 승전(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