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에 사는 죽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병사를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중간 줄임)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붉은 비단 철릭을 입고, 장사들을 거느려 의령현의 경내와 낙동강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라고 했다.’ 합니다.”
이는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6월 28일 기록입니다. 곽재우는 홀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고 또 왜적을 유인해서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곽재우의 의병은 수십 명으로 출발하여 2,000명에 이르는 큰 병력을 거느렸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1592년 5월 하순 무렵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지켜 농민들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짓게 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1차 진주성 전투에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한몫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는 밀양ㆍ영산ㆍ창녕ㆍ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지요. 죽은 뒤에 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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