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 4

임금이 되지 못한 왕자들

‘임금이 승하한 뒤, 첫째 아들인 왕세자가 즉위한다.’ 얼핏 보아 당연한 듯 보이는 이 명제는 실현되지 못한 적이 훨씬 많았다. 조선 역사에서 임금이 승하한 뒤,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왕세자는 겨우 일곱 명에 불과했다. 조선왕조 스물일곱 명의 임금 가운데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만 적자이자 장자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나마 요절하지 않고 꽤 오랜 기간 정사를 제대로 펼친 임금은 현종과 숙종뿐이었다. 웬만한 기업에서도 ‘가업 승계’와 ‘후계자 양성’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한 나라를 물려줘야 하는 봉건시대에 ‘왕세자 책봉’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자 출신 왕자들만 많거나, 서자 출신 왕자조차 거의 없거나, 적자 왕자는 있으나 군주가 지녀..

(얼레빗 제4730호) 사연을 간직한 비, 유두물ㆍ태종우ㆍ살창우

요즘은 장마철이어서 비가 억수로 올 때가 잦습니다. 그런데 내리는 비에도 사연을 간직한 경우가 있습니다. 명절인 유두날(음력 6월 15일)에 비가 오면 ‘유두물’이라고 하는데 이 유두물이 오면 연사흘 내리 내린다고 합니다. 그것은 부녀자들의 바깥나들이가 안되던 시절에 특별히 나들이를 허락받은 날임에도 비가 내리면 나들이를 하지 못해 그 한이 서려 사흘 동안이나 내린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특정한 날에 내리는 비에는 태종우도 있습니다. ▲ 우중(雨中)>, 그림 운곡 강장원 작가 ‘태종우(太宗雨)’는 심한 가뭄이 들어 백성이 고통받자 태종임금이 내가 죽어 하늘에 빌어 비가 오게 하리라고 유언하면서 죽었는데 죽은 그날 비가 내렸음은 물론 그 뒤 해마다 그날 곧 음력 5월 10일이 되면 태종우가 내렸다고 하지요...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휘두르나 – 인목황후, 「칠언시」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휘두르나 – 인목황후, 「칠언시」 늙은 소 논밭갈이 힘쓴 지 이미 여러 해 老牛用力已多年 목 부러지고 살갗 헐었어도 잠만 잘 수 있다면 좋으리 領破皮穿只愛眠 쟁기질, 써레질도 끝나고 봄비도 넉넉한데 犁耙已休春雨足 주인은 어찌하여 또 채찍을 두드리나 主人何苦又加鞭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가 큰 글자로 쓴 칠언시(七言詩)입니다. 크기는 세로 110cm, 가로 50cm이고 종이에 쓴 것으로 근대에 족자로 만들어졌는데,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칠장사(七長寺)에 소장되어 있지요. 광해군 5년(1613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아 사약을 받고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해 인목왕후가 칠장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건하면서..

고운 향기 거두어 이끼 속에 감추다 – 정온, 「절매식호중」

고운 향기 거두어 이끼 속에 감추다 – 정온, 「절매식호중」 매화야 가지 꺾였다고 상심치 말아라 寒梅莫恨短枝嶊 나도 흘러흘러 바다를 건너 왔단다 我亦飄飄越海來 깨끗한 건 예로부터 꺾인 일 많았으니 皎潔從前多見折 고운 향기 거두어 이끼 속에 감춰두렴 只收香艶隱蒼苔 조선 중기의 문신인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한시 「절매식호중(折梅植壺中, 매화가지 하나 꺾어 병에 꽃고)」입니다. 정온은 부사직(副司直)으로 있던 1614년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 그의 처형이 부당하며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斬首)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지요. 그러자 광해군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정온은 제주도의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말았습니다. 반정으로 인조가 보위에 오른 뒤 사자(使者)가 정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