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10

혜경궁 홍씨의 눈부신 처세 속 칠십 년 궁중생활

어머니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니, 궁중의 옛일부터 국가 제도, 다른 집 족보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한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서 질문하면 하나하나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그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 「혜경궁지문」, 《순조실록》, 1816년 1월 21일 / 20쪽 혜경궁 홍씨. 정조의 어머니이자 순조의 할머니인 그녀는 죽은 다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총명하다고 해서 ‘헌’, 늘 조심스러웠다고 해서 ‘경’이라는 글자를 썼다. 칠십 년 가까이 계속된 그녀의 궁중생활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이런 살얼음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로워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수밖에 없었다. 열 살에 입궁한 ..

세자의 공간, 동궁 (2) - 동궁의 위치와 구성

2. 동궁의 위치와 구성 개념적으로 동쪽에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더라도 그 위치가 명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대 왕조의 궁궐에서는 동궁을 임금의 영역 동쪽에 조성하였다. 자금성 등 중국의 궁궐도 그러하고, 개경의 경우 『고려도경』에 ʻ동쪽 문에는 ʻ春德ʼ이라 편액했는데, 세자궁으로 통한다 ~ 좌춘궁은 회경전 동쪽 춘덕문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가 처음으로 책봉되면 세자라 하고, 관례 이후 여기에 거처했는데, 옥우의 제도는 왕궁만 못하다.ʼ라고 하여 세자궁이 명실상부하게 동쪽에 있는 동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궁 전각은 대체로 ʻ당堂ʼ호를 갖고 있다. 임금의 전각이 ʻ전殿ʼ으로 지칭되는 것과는 차등을 둔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 임금의 전각은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으로 ʻ전호ʼ..

한글 위인 열전 - 선조와 정조의 특별한 편지

선조, 민심의 회복을 꾀하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경복궁에 방화 사건이 일어난다. 왜군이 한양 성안 가까이 쳐들어오자 임금인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을 떠나려 했는데,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내탕고(內帑庫, 조선 시대 임금의 개인적인 재물을 넣어 두던 곳간)에 들어가 왕의 보물을 약탈하고, 노비 문서를 보관하는 장례원(掌隷院, 조선 시대 노비 문서와 노비와 관련된 소송을 맡아보던 관아)과 형조(刑曹, 조선 시대에 법률, 소송, 형옥, 노예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불태운 것이다. 그 후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에 연이어 불을 질러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기까지 했으니, 이는 백성을 버린 조정의 위엄도 함께 매몰되어 불태워진 참담한 사건이자 조정에 대한 백성의 믿음..

조선 궁중문화의 터전 궁궐 - 궁궐의 역사: 양궐체제의 변천

2. 궁궐의 역사: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에는 궁궐이 다섯이 있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말이 다. 왕국이 사라지고 임금도 사라진 오늘날 대한민국 서울에는 궁궐이 있을 수 없다. 예전에 있었다는 뜻이라면 궁궐이 아니라 고궁(古宮)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서울에 고궁이 다섯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고궁이라고 하려면 어느 정도는 궁궐 모양을 갖추어야 할텐데 다섯이 모두 고궁 모양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 있던 궁궐을 다 따지면 다섯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그 다섯 궁궐이 동시에 있었던 적은 없다. 하나만 있던 적도 있고, 많을 때는 넷이 있기도 하였다. 궁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갔다. 이러한 궁궐의 변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2) 시호, 전호, 능호

3) 시호 시호(諡號)는 국왕이 사망한 후 살아있을 때의 언행을 참조하여 정하는 이름이다. 국왕의 시호에는 신하들이 의논하여 올리는 시호와 중국 황제가 정하여 내리는 시호가 있었다.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는 국왕이 사망하고 5일이 지난 후 입관 (入棺)을 하고 나서 의논하였다. 시호의 글자 수는 대개 8자였고, 글자 하나하나에 국왕의 일생을 평가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1800년(정조 24) 6월 28일에 정조가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7월 6일에 의정부와 관각(館閣)의 관리들이 정조의 시호, 묘호, 전호, 능호를 정하여 올렸다. 시호는 문성무열 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 묘호는 정종(正宗), 전호는 효원 (孝元), 능호는 건릉(健陵)이었다. 시호는 글자별로 뜻이 있었다. 경천위지(經天緯 地)를..

일제상품 불매한다면서 벚꽃축제에 목매다나?

천년이 넘은 일본인들의 벛꽃축제, 따라 하지 말자 “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에, 일본 놈들이 자기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 대대적으로 벚나무를 심었어요. 자그마치 1,800그루를 심은 겁니다. 그 나무들이 10년 남짓 자라니까 화사하게 꽃이 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일제는 그 벚꽃을 이용해서 정례적인 축제를 열어볼까 기획을 하고는, 1924년 봄에 연습 삼아서 조심스럽게 밤 벚꽃놀이 행사를 열었지요.” ▲ 1927년 4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창경원 밤범꽃 놀이 이 말은 예전 창경원 수의사였던 김정만 씨가 들려주는 “창경원 벚꽃놀이”가 시작된 내력이다. 일제는 우리의 궁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동물원을 만들었으며 벚나무를 심어 아예 조선의..

(얼레빗 4322호) 일본 정신 벚나무 1,800그루 창경원에 심어

“창경궁의 현판을 창경원으로 바꿔 달고 나서 2년이 지난 1911년에, 일본 놈들이 자기나라의 정신을 조선에 심는다며 창경원에 대대적으로 벚나무를 심었어요. 자그마치 1,800그루를 심은 겁니다. 그 나무들이 10년 남짓 자라니까 화사하게 꽃이 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일제는 그 벚꽃을 이..

9월 27일 - 동물원과 벚꽃을 걷어낸 창경궁을 찾아갑니다

“창경궁(昌慶宮)을 낙성(落成)하였다. 육승지(六承旨)에게 명하여 수리도감(修理都監)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에게 음식을 대접하도록 하고, 이어 홍문관(弘文館) 관원도 잔치에 참여하도록 명하였으며, 이날 장인(匠人)과 군인(軍人)들에게도 음식을 먹였다.” <성종실록> 170권, ..

4월 21일 - 일제는 창경궁에 동물우리를 만들어 원숭이를 들였습니다

원숭이랑 곰이 재주를 떤다 조선인들 좋아라 손뼉 치는 밤 손에 든 과자 하나 던져주면 신명은 하늘을 찌르고 피어 문드러진 사쿠라 꽃잎 사이로 저것들 똥냄새 묻어나와 어느새 새하얀 궁궐을 뒤덮는 밤 1909년 순종마음 달래려 구중궁궐 헐어내고 동물 우리 만들었다네 고약한 왜놈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