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이 다리(가체)를 높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궁중(宮中)에 이런 제도가 없었으니, (가운데 줄임) 풍속이 갈수록 사치스러운 데로 흘러 다리 한 꼭지의 비용이 자못 한나라 문제(文帝)가 말하는 열 집의 재산보다 많으니, 이는 곧 고려말의 퇴폐한 풍습이다.“ 이는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1757) 12월 16일 기록으로 여성들이 치장을 위해 머리에 높은 가발을 얹는 풍조를 개탄하여 임금이 다리를 얹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다리는 큰머리, 가체(加髢), 월자(月子), 월내(月乃)라고도 불렀는데 처음 문헌에 나오는 것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리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성종 때는 높이가 무려 30cm까지 되었다고 하지요. 이때 다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