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38

안경 낀 사람? 안경 쓴 사람?

안경을 낀다고도 하고 안경을 쓴다고도 한다. 이 두 말은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어서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다고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말 동사들은 제각기 자기 본연의 임무가 있어서, 그 임무에 맞게 사용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낱말이 가진 본래의 임무를 찾아 주면, 안경은 ‘끼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쓰는 것’이라고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끼다’는 낱말은 우리 몸의 일부에 꿰는 것을 표현하는데 한자말로는 ‘착용’에 가까운 말이다. 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다’, ‘장갑을 끼다’ 들처럼 사용한다. 이에 비해 ‘쓰다’는 우리 몸에 무엇인가를 얹어 놓거나 덮거나 또는 걸쳐 놓는 것을 이르는 동사이다. ‘모자를 쓰다’, ‘우산을 쓰다’, ‘안동 ..

모지랑이와 바람만바람만

우리가 어려운 한자말을 앞세워 으스대고 영어를 숭배하는 말글살이를 하는 동안, 안타깝게도 나날살이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거나 이미 낯설게 돼버린 우리 토박이말들이 많아졌다. 그 가운데는 꼭 붙잡고 싶은 아름다운 말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지랑이’와 ‘바람만바람만’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순 우리말이다. 한복 저고리 치맛단을 끌고 다니다 보면 끝이 닳아서 없어질 수가 있다. 땅에 끌리도록 길게 입는 청바지도 마찬가지다. 또, 교실 책상을 오랫동안 쓰다 보면 네 귀퉁이가 닳아서 뭉툭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어떤 물체의 끝 부분이 닳아서 없어지다”는 뜻으로 쓰이는 우리말이 바로 ‘모지라지다’이다. 붓글씨를 오래 쓰면 붓끝이 닳아서 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도 “붓이 모지라졌다.”고 ..

‘주책’이 필요한 사람들

‘주책’은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염치’는 좋은 말일까, 나쁜 말일까? 평소에 ‘없다’를 붙여서 주로 좋지 않은 뜻으로 말하다 보니, 어떤 말들은 그 말 자체가 부정어처럼 인식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책’이나 ‘염치’는 꼭 있어야 하는 덕목이다. 최순실 국정 독차지에 이은 대선 정국이 펼쳐지면서 특히 염치가 없는 사람, 주책이 없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뜨여 가슴이 답답하다. ‘주책없다’는 말에서 ‘주책’은 본디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을 뜻하는 낱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주책’은 꽤 괜찮은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한 주책이 없는 사람이나 행동을 가리켜 ‘주책없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뜻으로 흔히 “너, 왜 그렇게 주책이니?”, “정말 주책이야.” 따위처럼 ‘주책이다’로 ..

천상 여자라고요?

뉴스에서 가끔 “아무개 선수가 보란듯이 2관왕에 올랐습니다.”란 보도를 들을 수 있다. 뭔가 내세울 만하거나 자랑한다는 뜻에서 ‘보란듯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표준말이 아니다. 이 문장은 “아무개 선수가 여봐란듯이 2관왕에 올랐습니다.”로 고쳐 써야 한다. 예전에는 ‘보아란듯이’와 이 말을 줄인 ‘보란듯이’를 모두 쓰기도 했지만, 지금 표준말에는 “우쭐대고 자랑하듯이”라는 뜻으로 ‘여봐란듯이’라는 말만 인정하고 있다. 사극에서 ‘여봐라’란 말을 자주 듣는데, 바로 이 말에서 ‘여봐란듯이’가 나왔다. 맛집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보도자(리포터)가 “싱싱한 횟감이 지천에 널려 있다.”란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지천’(至賤)은 “아주 흔한 것”을 가리킬 때 쓰는 한자말인데,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말 ‘밥먹다’가 어느 틈엔가 ‘식사하다’에 밀려나고, ‘휴식하다’가 ‘쉬다’를 밀어내고, ‘나서다’라는 우리말도 ‘출발하다’에 쫓겨나기 직전이다. ‘한자말+하다’투의 말들이 우리말 용언들을 하나둘씩 몰아내는 현상이 이미 오랫동안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한자말에 ‘하다’를 마구 붙여 써서 말하다 보니, ‘하다’를 붙여서는 안 되는 말까지도 이렇게 쓰는 사례들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반하다’란 말이다. “민중의 삶에 기반한 민족예술”이라든지, “헌법 정신에 기반한 민주적 제도”와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언론을 통해 퍼뜨려지고 있다. 그러나 ‘기반하다’는 말은 어느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기반’은 “기초가 되는 바탕” 또는 “사물의 토대”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에 ‘하다’를 붙여 ‘기반하..

‘이력’과 ‘노총’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며 여행자의 계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취업 철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의 문을 두드리는 계절이다. 취업을 위한 첫 준비가 바로 이력서를 쓰는 것이다. ‘이력’은 자기가 겪어 지내온 학업과 경력의 발자취이고, ‘이력서’는 이 이력을 적은 서류를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자말 ‘이력’ 말고 순 우리말 가운데도 ‘이력’이 있다. 순 우리말 ‘이력’은 “많이 겪어 보아서 얻게 된 슬기”를 뜻한다. 가령, “이젠 이 장사에도 웬만큼 이력이 생겼다.”와 같이 어떤 일에 ‘이력이 나다’, ‘이력이 붙다’처럼 사용하는 말이다. 이럴 때 쓰는 ‘이력’과 한자말 ‘이력’은 전혀 다른 말이니 잘 구별해야 한다. 한글학회는 한자말 ‘이력’을..

무동 태우다

‘무동 태우다’는 말은 본래 사당패의 놀이에서 나온 말이다. 여장을 한 사내아이가 사람 어깨 위에 올라서서 아랫사람이 춤추는 대로 따라 추는 놀이가 있었는데, 이때 어깨 위에 올라선 아이를 ‘무동(舞童)’이라고 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이 번져서, 어깨 위에 사람을 올려 태우는 것을 ‘무동 태우다’라고 하게 되었다. ‘무동’은 한자말이고, 순 우리말로는 목 뒤로 말을 태우듯이 한다고 해서 생겨난 ‘목말 태우다’라는 말이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다.”라 할 때의 ‘도무지’란 말은, 대원군 시대에 행해지던 형벌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포도청의 형졸들이 죄수에게 사형을 집행할 때에, 백지 한 장을 죄수의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리면 죄수의 숨이 막혀 질식사를 했는데, 이것을 ‘도모지(塗貌紙)’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