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5

민족지의 신화 - 채백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의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미화시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어린 시절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 사건을 배우면서 또는 일제 탄압에 맞서 싸워온 사례들을 들으면서, 지금은 변절했지만 그래도 창간 초기와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지로서 국민들의 가슴에 자긍심을 갖게 해 준 신문이라 알아왔었던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 책이다.3.1운동 독립선언서 작성 33인 중 한용운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변절할 수 밖에 없었던 어려운 시절이라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자기 반성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미화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에 언론이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시절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일제에 빌붙어 온갖 ..

임시정부에서 탄핵받은 이승만, 독립운동가 아니다

지난 12월 29일 보훈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고 발표했다. 보훈부는 "이승만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였고,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서 한인자유대회 개최와 한미협회 설립 등의 활동을 하였다"라고 꼽은 까닭을 밝혔다. 하지만 이런 보훈부의 발표에 고개를 끄떡일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가 정말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뛰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국민을 버린 이승만이 웬 국부? 이렇게 보훈부가 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은 데는 보훈부의 전 장관과 현 장관의 ‘이승만은 국부’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난해 8월 11일 한국일보의 기사에 보면 당시 박민식 장관이 "이 전 대통령의 공과 과에 대한 의..

이승만은 국부가 될 수 없다

오늘은 일제에서 광복된 지 78돌을 맞는 날이다. 이 78돌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일보 2023년 8월 11일 치에 "이승만은 나라 세운 초대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보면 보훈부 박민식 장관은 "이종찬 광복회 회장도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대해선 대찬성한다.”라고 말했다. 사실일까? 2023년 8월 1일 남도일보를 보면 이종찬 회장이 대담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 반대"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또 이종찬 회장은 광복회장 취임사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 발행한 관보에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돼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한 거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원년은 1919년이기에 광복회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종찬..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 기념우표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한국 독립운동을 돕고 일제에 대항했던 외국인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특히 실존 인물을 재현한 작품이 많아 당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기념우표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대표적 인물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와 조지 루이스 쇼를 소개합니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한국명: 석호필)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의학자이자 선교사이며, 1916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1919년 3·1운동 첫날부터 사진을 찍고 기록하여 해외에 알렸으며,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 사건 현장에도 찾아가 일제의 만행을 보고서로 남겼습니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그는 틈틈이 강연과 기고를 통해 한국..

김상옥 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우표

일제강점기에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김상옥 의사는 서울 한복판에서 군경 1천여 명과 대치했던 ‘일 대 천 서울시가 전투’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는 목숨을 던져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을 되살린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입니다. 가난한 집안의 소년 노동자였던 김상옥 의사(1889-1923)는 형제들과 돈을 모아 동대문 앞 영덕철물점을 창업하여 청년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나 그는 편안한 삶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동업조합’을 결성하여 일본 상권에 대항하였고, 1919년에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온 시간과 힘을 다했습니다. ‘혁신단’을 조직하고 비밀신문 ‘혁신공보’에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다 일경의 추적을 받은 김상옥 의사는 일제를..

서울특별시교육청 남산도서관 개관 100주년 기념우표

서울 최초의 공립공공도서관인 서울특별시교육청 남산도서관이 시민을 향해 문을 연 지 올해로 10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공공도서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남산도서관 개관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강압적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 거세어졌고, 인재 양성을 위한 도서관 건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1922년 10월 5일에 명동의 한성병원을 고쳐 경성부립도서관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경성부립도서관은 1927년에 당시 대관정(영빈관)인 소공동으로 이전하였으며, 해방 이후부턴 남대문도서관으로 불렸습니다. 이후 1965년 1월 27일, 현재의 위치(후암동)에 개관하여 지금까지 지역의 독서문..

잊혀진 역사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전

서울시가 독립운동사에서 조명되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를 개최한다. 서울시가 운영 중인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는 류준화 작가의 ‘33인 여성독립운동가에게 바치다’ 전시를 기획, 광복절 기간인 8월 25일(목)까지 시민들에게 무료 개방한다. 서울여담재는 공적인 영역에서 기록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았던 여성의 이야기를 수집·기록하며, 이를 새롭게 해석하고 연구해 서울 시민 및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기 위한 여성역사공유공간으로 ’21년 4월 문을 열었다. 작은 도서관, 전시공간, 교육공간 등을 운영하고 있다. 류준화 작가는 3·1운동,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에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없다는 궁금증을 기반으로, 이번 작품을 통해 3·1운동의 현장에서 드러나지 않았..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기린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도쿄)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한국인 유학생 6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결의문을 배포한 ‘2·8독립선언’의 고귀한 업적과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 2.8 독립선언서 전문(재일본 한국YMCA 제공)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 이하 ‘보훈처’)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 103주년 기념식’이 오는 8일(화) 오전 11시, 일본 도쿄 재일본한국와이엠시에이(YMCA) 한국문화관에서 열린다고 밝혔다. 기념식은 재일본한국와이엠시에이(이사장 정순엽) 주관으로 열리며, 독립유공자 후손, 재일단체 관계자, 유학생 대표, 교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다. 이번 행사는 국민의례, 기념사, 성경봉독, 2‧8독립선언서 낭독,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며, 온라인..

우당의 고종 망명 계획

《우당 이회영과 범정 장형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보면 우당이 고종 망명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다 고종이 갑자기 붕어하는 바람에 실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래 이규설의 신한혁명단에서 1915년 고종 망명을 추진하다가 실패하였는데, 우당은 1918년 11월 자신의 아들 이규학이 고종의 조카딸과 신부례를 올리는 것을 기회로 삼아 고종의 망명을 다시 시도합니다. 신부례란 신부가 시집에 와서 처음으로 올리는 예식이라고 하는데, 우당은 신부례를 올리는 것을 기회로 고종과 접촉하여 망명을 타진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아들 이규학이 이미 3년 전에 고종의 조카딸과 결혼하였지만, 고종 망명을 추진하면서 이때 신부례를 추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하여 고종에게 망명을 타진하였고, 고..

(얼레빗 4674호) 겨레를 위한 저항정신의 표본 김창숙 선생

“백범은 흉탄에 쓰러지고/ 단재는 수문랑(하늘의 벼슬)으로 멀리 갔네/ 가련한 손, 홀로 남은 심산 노벽자(늙은 앉은뱅이)/ 여섯 해 동안 삼각산 아래 몸져누웠도다.” 이 시는 심산 김창숙 (1879~1962) 선생이 병상에서 백범 김구와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며 쓴 시입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고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 (1905)이 단행되자 스승 이승희와 대궐 앞으로 나아가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시작으로 1960년 4·19 직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의장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민족운동사 중심에 서 계셨던 분입니다. ▲ 평생을 겨레를 위한 저항정신으로 살다간 심산 김창숙 선생(독립기념관 제공)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130여 명의 뜻을 모아 한국 독립을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