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책을 읽자

민족지의 신화 - 채백

튼씩이 2024. 12. 17. 15:13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의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미화시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어린 시절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 사건을 배우면서 또는 일제 탄압에 맞서 싸워온 사례들을 들으면서, 지금은 변절했지만 그래도 창간 초기와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지로서 국민들의 가슴에 자긍심을 갖게 해 준 신문이라 알아왔었던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 책이다.

3.1운동 독립선언서 작성 33인 중 한용운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변절할 수 밖에 없었던 어려운 시절이라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자기 반성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미화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에 언론이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시절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일제에 빌붙어 온갖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해방 이후 신분세탁을 거쳐 애국자로 변신한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출판사 리뷰

‘민족지 신화’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던 두 신문의 과거사를 ‘민족지’라는 개념으로 평가하는 인식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의 두 신문이 식민 지배의 가혹한 탄압에 저항하며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며 투쟁한 역사라고 평가하는 인식이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해산된 직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스스로 민족지 신화를 만들어 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정간 및 폐간당한 역사를 들어 저항하다 탄압을 받은 면으로 부각시켜 스스로를 민족 대표 신문으로 명명해 온 것이다. 그러한 역사는 1970년대 이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두 신문은 더 이상 민족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책은 창간 100주년이 넘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역사를 비롯해, 광복 이후에 두 신문의 역사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어 온 과정을 분석한다. 일제 강점기 민간지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역사적 평가의 변천 과정은 거의 연구되지 못했다. 친일 청산 문제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오늘날 민족지 신화가 생성되고 굴절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이 책은 이론적 및 실천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조선일보>와 <시사신문>은 친일 진영에 의해 창간된 신문이다. <조선일보>는 조일동화주의(朝日同化主義)를 표방하고 나선 친일 단체 대정친목회에 의해 창간되었다. (중략) <시사신문>도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던 친일 단체인 국민협회의 기관지였다. (중략) 한편 <동아일보>는 민족진영을 대표한다는 명분으로 허용되었다. 그러나 창간의 주역인 김성수 일가는 일제의 지원과 비호 속에 그들과 타협하는 식민지 토착 자본가의 성격을 드러낸다. 창간 당시의 진용을 보더라도 일제와 밀착된 성격이 드러난다. 개화기 이해 친일파의 거두였던 박영효가 초대 사장을 맡았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근무한 이상협이 편집국장을 맡았다. 이와 같이 일제와 밀착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신문 창간을 인가받았던 것이다.   - 24쪽 -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에 각기 복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당시 사회의 친일 청산이라는 이슈에 대해 어떠한 입장이었을까? 두 신문은 초기부터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과거의 친일보다는 현재의 반민족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개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51쪽 -

 

최영태는 이 논문에서 1930년대 후반 <조선일보>의 지면은 온통 친일적인 기사로 채워졌다며 상대적으로 통제가 덜한 경제 기사에서도 친일적 논조를 보인 것이 폐간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총독부 기관지와 아무런 차별성이 없는 신문이었기게 전쟁에 집중하기 위한 물자 절약 차원에서 폐간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일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동아일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 282쪽 -

 

그렇다면 두 신문이 노골적으로 지면을 통해 친일 행각을 벌이던 1930년대 후반부터 불과 10여 년 지난 뒤부터 자신들의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는 작업에 나섰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지가 제일 큰 미스터리로 남는다. 아마도 미군정 3년의 극단적인 혼란과 뒤이은 분단, 그리고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정치적 대혼란기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혼돈의 시대에 대다수 국민은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민생고 해결이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신문의 과거사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의 회고나 신문의 지면을 통해 조금씩 과거 역사를 미화하는 작업을 시도해도 별다른 문제 제기나 비판도 없는 것을 보면서 두 신문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 354~355쪽 -

 

1980년경까지 <조선일보>는 신문업계의 3~4위 정도의 위상이었지만 그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하였다. 1987년의 자료를 보면 매출액은 1980년과 비교하여 428%로, 자산 총액은 1979년과 비교하여 927%로 증가하여 업계 1위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급성장한 배경은 전두환 정권과 밀착된 결과로 해석된다. 반면 <동아일보>는 1976년의 광고 사태로 130명이 넘는 언론인들이 해직당함으로써 생긴 인력의 공백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선일보>에 추월당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점차 확대되고 이를 바탕으로 논조 면에서도 과잉된 면모를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보도 태도가 1987년 이후 민주화 국면에서도 이어지며 1990년대 후반부터는 시민 사회의 안티조선 운동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 35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