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책을 읽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서울편 1 - 유홍준

튼씩이 2018. 7. 28. 17:47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2권 중 1편으로 부제는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로, 이는 창덕궁 존덕정에 걸려 있는 정조대왕의 글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예술이라고 했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다.


봄에 덕수궁과 창덕궁과 후원에 갈 기회가 있어 다녀왔는데, 후원은 해설사가 있어 그나마 전각이나 연못 이름 정도는 알고 왔지만, 덕수궁과 창덕궁은 시간도 부족하고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어 그냥 스치며 지나갔었다.

이번에 책을 통해 그 때 보았던 건물이나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던 다리에 대해 알게 되고, 나아가 우리가 아끼고 지켜나가야 문화유산으로서의 궁에 대해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어진 우리의 문화재를 생각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다스리기 어렵지만, 그나마 36년 만에 나라를 되찾음으로써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던 점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된다.


5대 궁궐 중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대목에서는 비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봄에 경희궁에 갔을 때 늦은 시각이라 정문만 보고 왔는데 일본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훼철되고, 덕수공은 공원으로 개조되고, 창경궁은 식물원, 동물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는 있는 내용이었지만 다시 한 번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을 통한 조선인의 우민화 작업이 세밀하게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종묘의 아름다움은 갈 기회가 있어 보게 되더라도 작가가 얘기하는 만큼을 느낄 수는 없을 거라 생각되지만, 창덕궁에 가게 된다면 돈화문 앞의 월대나 금천교는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이다. 일종의 신전이다.  - 18쪽 -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서는 도읍(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社稷)을 세우라고 했다. 이를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한다. 사직에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은 곡식의 신을 말한다.  - 28쪽 -


현재 종묘는 19칸의 정전과 16칸의 영녕전, 공신각과 칠사당 그리고 제례를 위한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정전 하나뿐이었고 그것이 곧 종묘였다. 규모도 7칸으로 작았다. 정전이 지금처럼 장대한 규모로 확장되고 영녕전이라는 별묘까지 건립된 것은 조선왕조 500년의 긴 역사가 낳은 결과였다.  - 30 ~ 31쪽 -


현재 정전에는 19분의 왕(왕비까지 49)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16분의 왕(왕비까지 34)을 모셨다. 조선의 역대 임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태정태세문단세대로 27명이지만 35명의 왕이 모셔진 것은 태조의 선조 네 분, 사도세자(장조), 효명세자(익종)처럼 나중에 왕으로 추존된 분이 열 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왕후의수가 왕보다 더 많은 것은 원비의 뒤를 이은 계비도 함께 모셨기 때문이다.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왕은 대개 정전에 모셔졌고, 태조의 4대조와 재위 기간이 짧은 분, 자중에 추존된 분은 영녕전에 모셔졌다. 다만 효명세자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어 정전에 모셔졌고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끝내 종묘에 들어오지 못했다. - 38-

 

칠사당에 모신 일곱 신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칠사란 궁중을 지키는 민간 토속신앙의 귀신들로 사명(司命), 사호(司戶), 사조(司竈), 중류(中霤), 국문(國門), 공려(公厲), 국행(國行) 등이다. 사명은 인간의 운명, 사호는 인간이 거주하는 집, 사조는 부엌의 음식, 중류는 지붕, 국문은 나라의 성문, 공려는 상벌, 국행은 여행을 관장한다. 그러니 칠사 토착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세상을 잘 다스리기 힘들 것이다. - 44-

 

창덕궁 후원의 단풍이 화이불치(華而不侈,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한다면 종묘의 단풍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 할 만하다. - 54-

 

5대 궁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느 하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복궁엔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창경궁은 식물원, 동물원이 되었으며, 경희궁엔 일본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훗날의 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훼철되었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개조되었다. - 100-

 

동궐이라 불리던 창덕궁과 창경궁은 조선의 멸망으로 이왕가의 집안 유산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 이상 궁궐이 아니라 그저 왕손들이 거처하는 곳이 되면서 사용하지 않는 건물들이 폐가가 되어 하나둘 씩 헐려나갔다. 동궐도를 기준으로 볼 때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전체의 5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 105-

 

월대의 크기는 건물의 규모와 성격에 따라 다른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 월대는 길이 18미터, 높이 1미터로 제법 크고, 옆면이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들려 있어 번듯하다. (중략) 월대는 공식적인 행사의 장이었고 왕과 신하가 백성들과 소통하는 마당이었다. - 108 ~ 109-

 

불을 피우는 행사를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행했다. 이를 찬수개화(鑽燧改火)’라 한다.

현대사회에서 24절기는 큰 의미가 없지만 자연과 긴밀히 호흡을 맞추며 살았던 조선시대에는 바야흐로 계절이 바뀌는 입춘, 입하, 입추, 입동마다 불씨를 바꾸는 개화라는 의식이 있었다. 옛 가정에서는 부엌의 불씨는 절대로 꺼뜨려서는 안 됐다. 하지만 불씨를 오래 두고 바꾸지 않으면 불꽃에 양기가 넘쳐 돌림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기마다 바꾸어주었다. 이를 개화라 했는데, 나라에서 직접 지핀 국화(國火)를 각 가정까지 내려 보내 새 불씨로 삼게 했다. - 116-

 

3조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를 말한다. 외조는 의례를 치르는 인정전, 치조는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 연조는 왕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이 주 건물이다. 경복궁에서는 이 3조가 남북 일직선상에 있지만 창덕궁에서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래서 경복궁엔 중국식의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면 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가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 129-

 

창덕궁 후원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별도의 이름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궁궐 뒤쪽에 있어 후원, 북쪽에 있어 북원, 궁궐 안에 있다고 해서 내원,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어 금원이라 했고, 나중에는 비원이라는 일반명사로도 불렸다. - 218-

 

궁궐 건축에서 건물 이름 끝에 붙는 명칭을 살펴보면, 건물의 형태, 성격, 지위에 따라 대략 여덟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홍순민 교수는 이를 간략히 정리해 (殿), (), (), (), (), (), (), ()’으로 요약했다.

전은 선정전, 대조전처럼 왕과 왕비의 건물에만 사용되었고, 당은 희정당, 영화당 등 왕이 정무를 보는 집과 왕세자의 정전인 중희당 같은 건물에 쓰였다. 각은 신하들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왕세자가 서연을 여는 성정각, 내각의 학사들이 근무하는 규장각이 그 예다. 그보다 중요도가 낮으면 합이라 했다. (홍교수는 합이 각보다 오히려 높다고 보았다.)

재는 낙선재처럼 서재 내지 사랑채의 성격을 지닌 집이고, 헌은 마루가 넓은 건물에 붙였으며, 루는 주합루처럼 이층 건물이라는 뜻이다. 정은 정자인데, 사다리나 계단으로 오르는 구조이면 평원루처럼 루라고 불렀다. - 270 ~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