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책을 읽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서울편 2 - 유홍준

튼씩이 2018. 8. 11. 20:44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2권 중 2편으로 부제는 '유주학선 무주학불(有酒學仙 無酒學佛 -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로 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에 찍혀 있는 도장에 있는 글이라고 한다.


2권에서는 한양도성을 시작으로 자문밖, 덕수궁과 그 외연, 동관왕묘, 성균관에 관해 기록했다.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이며,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으로, 영어로 시티 월(city wall)이란다.

덕수궁은 책을 읽으면서 봄에 갔던 기억을 떠 올라 보다 가깝게 느껴졌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이면서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라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동관왕묘가 임진왜란 때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이 주둔지에 관왕묘를 세우면서 등장했고, 삼국지의 영웅인 관우가 사후에 점점 신격화되어 관왕으로 받들어지면서 사당보다 격이 높은 묘가 되었으며,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도 여러 곳에 왕관묘가 있고, 중국인들이 최고로 모시는 신이라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성곽 축조 공사는 총 길이 59,500척을 600(180미터)씩 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구역 하고도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자락의 자연 암반과 절벽을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중략)

97개 공사 구역의 이름은 1, 2, 3, 4로 붙이지 않고 천자문 순서대로 매겼다. 북악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돌면서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의 천 자로 시작해 이어서 지 자 구역, 현 자 구역, 황 자 구역 등으로 계속 구획하여 97번째 글자인 조민벌죄(弔民伐罪, 불쌍한 백성을 돕고 죄지은 자를 벌하다)의 조 자까지 97구역의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한양도성의 성벽 곳곳에는 진자 종면(侲子 終面, 진 자 구역 끝 지점)’ ‘강자 육백척(崗字 六百尺, 강 자 구역 600)’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 또는 현의 담당 지역을 나타내 의령 시면(경상남도 의령 구역의 시작 지점)‘ ’흥해 시면(경상북도 포항시 흥해 구역의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36 ~ 38-

 

사대문은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현 숙정문), 정동에 흥인문(興仁門),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이다. 사소문은 동남쪽 남소문은 광희문(光熙門), 동북쪽 동소문은 홍화문(弘化門, 훗날 혜화문이라 바꿈), 서북쪽 북소문은 창의문(彰義門), 서남쪽 서소문은 소덕문(昭德門)이다. - 39-

 

단적으로 말해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 영어로 말해서 포트리스(fortress)가 아니라 시티 월(city wall)이다. 만약에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축조했다면 석벽을 사다리꼴로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 파서 두르는 등 겹겹의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했다. 도성이 울타리이기 때문에 숭례문을 비롯한 관문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행문 이상의 기능을 하지 않았다. 동대문을 옹성처럼 두른 것은 전투를 의식해서가 아니라 풍수상 허하다는 서울의 동쪽 지세를 보완한다는 의미였을 뿐이다. - 48-

 

덕수궁이라 불리기 훨씬 전에 이미 이곳엔 경운궁이라는 궁궐이 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략)

이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중략)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 , 목숨 수() , 덕수라는 이름을 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략)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의 3분의 1인 약 1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 195 ~ 197-

 

!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 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 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 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 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 389-

 

성균관이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향사공간인 대성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교와 학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이면서 동시에 유교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예를 올리는 종교공간을 갖고 있는데 이를 문묘라 한다. 불교에 사찰이 있듯이 유교엔 문묘가 있고, 사찰에 대웅전이 있듯이 문묘엔 대성전이 있고, 사찰엔 관음전·지장전이 있어 보살을 모시듯이 문묘엔 동무·서무가 있어 역대 성현들을 모시는 것이다. - 448-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불국사·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 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 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 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