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게시판/우리말은 재미있다(장승욱)

015 - 성애술

튼씩이 2019. 3. 10. 15:16

역사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은 말라리아라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술독에 빠져 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술시가 되면 술꾼들은 자동적으로 술이 고파져서 거리고 나선다. 술시(戌時)는 저녁 일곱 시에서 아홉 시까지를 가리카는데, 술(戌) 자가 또 개 술 자 아닌가. 비록 욕이지만 술 취한 사람을 술먹은 개라고 하는 것을 보면 술꾼과 술시, 그리고 술은 여로모로 궁합이 맞는 것 같다.


그렇지만 멋도 맛도 모르고 무턱대고 함부로 들이켜는 벌술, 보통 때는 안 먹다가도 입에만 대면 한없이 먹는 소나기술은 아무리 술배가 크고 천하에 없는 장사라고 해도 결국엔 술망나니 아니면 술도깨비가 되어 술먹은개라는 욕이나 듣게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술을 도깨비뜨물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화가 난 김에 마시는 홧술, 안주 없이 마시는 강술도 마찬가지다.


돈은 없는데 술을 먹고 싶어서 가을에 벼로 갚기로 하고 외상으로 마시는 술은 볏술이라고 한다. 요즘 가드를 긋고 술을 마시는 일과 다를 것이 없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면서 집안 내림으로 잘 먹는 술은 부줏술이라고 하는데, 부줏술이든 아니면 벌술이나 소나기술이든 한량없이 술을 마시는 양이나 또 그렇게 마셔서 고주망태가 된 상태를 억병이라고 한다. "억병으로 취했다"고 할 때의 그 억병이다. 억병이라, 소주를 무리해서 하루에 세 병씩 마신다고 치면 도대체 어느 세월에 억 병을 마실 수 잇나. 계산해 보니 간단하다. 9만1,324년만 살면 된다. 10만 년을 사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9만 몇 년이야 국방부 시계 돌리던 것처럼 하면 금방 지나가지 않을까. 그때까지 간을 끄떡없이 간수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성애술 (명) 흥정을 도와준 대가로 대접하는 술


쓰임의 예 - 강아지 흥정에도 성애술이 있다는 것인데, 이런 일에 술 한 잔이 없어야 쓰겠소.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부줏술 집안 대대로 내려오면서 집안 내림으로 잘 먹는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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