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물론 두음법칙에 따라 표준말은 ‘임’이다)이 되어 만난 사랑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를 노래한 가요가 있었다. 김명애의 <도로 남>이다. 남과 님의 관계가 점 하나로 갈리듯, 나와 너의 사이도 그렇다. 점이 기둥의 왼쪽에 붙느냐, 오른쪽에 붙느냐에 따라 나와 너로 나뉘는 것이다. 아니다. 요즈막엔 ‘너’를 ‘니’로 부르는 경향이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나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면 니가 되고, 또 점 하나를 붙이면 도로 나가 된다. 나와 니. 나니. 나니? 일본말로 하면 뭐?
나는 뭐고 너는 뭔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노래(김국환의 <타타타>)도 있었지만, 나도 잘 모르는데 너까지 공부하기는 아무래도 힘에 부칠 것이므로 너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먼저 나부터 챙기자.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걸 모르니까 정태춘은 내가 섰는 곳은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노래했을 것이고, 슈퍼트램프(Supertramp)의 릭 데이비스도 <로지컬 송(Logical Song>)에서 후 아이 앰?(Who I am?) 후 아이 앰? 외쳤을 것이다. 답답하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전에는 제나, 참나, 몸나, 얼나 같은 말들이 실려 있다. 제나는 제 것으로서의 자신을 말한다. 한자말 자아(自我)에 해당하는 말이다. 참나는 참된 본래 모습의 나를 뜻하며, 몸나가 그 반대말로 돼 있다. 몸나는 몸뚱이로서의 나인데, 그러면 몸뚱이는 참된 본래 모습이 아니고 거짓된 허깨비라는 말인가. 살갗 밑에서 핏줄이 벌떡벌떡 뛰고, 무좀에 걸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어여쁜 것 앞에 서면 하릴없이 붉어지는 낯바닥, 이 모든 것이 한낱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참된 것만이 본래의 모습일까.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하나로 아우를 때 본래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얼나는 얼, 즉 정신으로서의 나를 뜻한다. 이렇게 여럿의 나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인가.
너나들이 (명)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허물없이 말을 건넴. 또는 그런 사이.
쓰임의 예 – 익삼 씨는 벼르고 별렀던 으름장을 놓았다. 지서장하고 너나들이로 지내는 처지임을 은근히 과시하는 소리였다. (윤홍길의 소설 <완장>에서)
-이춘동이는 꺽정이에게 붙들려 묵는 중에 여러 두령과 서로 너나들이까지 하게 되고 또 청석골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도 하게 되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이 말만은 꼭 갈무리하자
참나 – 참된 본래 모습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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